환자에게 쓰이는 용품들은 멸균상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거즈에서부터 수술도구까지 일회용품이 많다. 드레싱을 위한 소독솜, 거즈, 테이프, 붕대 등은 모두 한 번 쓰고 버려진다.
디피세트(D-P set)라는 소독용 접시 그릇도 이제는 일회용으로 쓴다. 더불어 주사침, 주사기, 채혈용기, 몸에 들어가는 각종 도관들도 모두 일회용품이다.
멸균처리되어 한 개씩 개별 포장되어 있어서 나오는 폐기물 양도 많다. 의료용 폐기물은 주황색 비닐봉투와 하얀색 의료용 폐기 박스에 담아서 처리한다. 병동이나 응급실에는 의료용 폐기물이 한가득 담긴 박스를 볼 수 있다.
의료용품 사용은 낭비라고 느껴지지만 필요불가결한 측면도 있다. 오염되지 않은 멸균상태의 물품을 쓰는 건 추가적인 감염을 예방하는 데 필수적이다. 과거에는 기구들을 다시 소독해서 쓰는 경우가 많았지만 현재는 일회용품이 더 많다.
의학 역사에서 짐멜바이스 박사가 산욕열과 관련하여 의료인의 손 닦기가 감염을 예방한다는 사실을 밝혀내면서 의료 처치에서 멸균의 중요성이 밝혀졌다.
당시에는 세균과 감염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아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었다. 짐멜바이스 박사가 일하던 병원 산모 병동에서 산욕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당시 산모를 진찰하는 의사들이 해부실습을 하고 손을 씻지 않은 채 산모들을 진찰했고 의료인의 손을 통해 감염이 전파되었다.
그로부터 멸균과 소독에 대한 개념이 발전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병원 내에서 발생하는 감염, 의료진의 손 씻기 그리고 의료기구의 소독이 점차 정립되었다. 의사를 상징하는 것 중에는 깨끗이 나란히 나열된 알루미늄 메스나 포셉Forcep 등이 있다. 하지만 요즘에는 소독용 포셉도 플라스틱 일회용품이 널리 쓰인다. 수술 시 쓰이는 멸균 방포나 수술 가운도 일회용을 선호하는 의사들이 많다.
'노 임팩트 맨'이라는 책을 읽었다. 콜린 베번이라는 작가가 뉴욕이라는 현대 문물이 집약된 곳에서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고 일 년 동안 사는 과정을 써내려간 책이다. 책은 그가 왜 이러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는지 밝힌다.
그는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여러 일회용품과 교통, 전기, 물 등을 충분히 아끼면 지구를 보호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말한다.
지구를 보호하자, 쓰레기를 줍자 혹은 전기를 아끼자와 같은 문구로 다른 이들을 계몽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자신과 가족의 수도승 같은 절제 생활로 오염을 생산하지 않는 것이다. 화장지 쓰지 않기, 엘리베이터 및 자동차 타지 않기, 화학제품 쓰지 않기, 지역에서 나는 로컬 푸드 먹기가 그것이다.
번잡한 뉴욕에서 자전거를 타고 매일 출근하고 12층 높이의 빌딩까지 걸어서 올라간다. 베이킹 소다로 머리를 감고 농산물 직거래 장터에서 파는 채소를 먹는다. 일회용품을 쓰지 않기 위해 길거리에서 흔히 파는 피자, 핫도그, 커피도 마시지 않는다.
그는 환경에 영향을 주는 모든 행위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다는 의미로 '노 임팩트 맨'이라고 자신을, 그리고 책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니 '노 임팩트 맨'은 지금의 의료현장을 보면 기겁하지 않을까 싶었다.
본원은 일회용품 사용이 당연했다. 그래서 보령으로 파견을 나갔을 때 많은 물품들을 멸균 소독해 재사용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동시에 우습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지방은 돈이 부족해서 이런 것도 일회용품으로 안 쓰고 멸균소독해서 쓰고 있나 싶었다.
하지만 의료 기구들이 꼭 일회용품일 필요는 없다. 나아가 일회용 의료용품과 멸균 소독 후 재사용하는 용품이 감염에 미치는 영향이 같을지 궁금했다.
의료진의 손 씻기와 같이 감염을 막는 기본적 행위는 중요하다. 그렇지만 일회용품을 늘려가는 것이 순수하게 의료를 위한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면에는 의료용품을 다량으로 수출하고 판매하는 기업들의 속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책에서도 지적하듯 미국 지성인은 늘 의심하고 비판했다. 미국의 굵직한 정책들은 그것이 설사 환경에 해가 되는 정책이라도 기업들의 로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일회용품의 과도한 사용 역시 의사로서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생각과는 달리 '의료용품은 아까워하지 말고 팍팍 써야 한다'는 이들을 마주칠 때가 있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물품을 준비하지만 그중 반 이상을 폐기한다. 또 멸균 장갑을 끼고도 조심하지 않고 버리고 새 것으로 교체한다. 단순한 드레싱 처치 때마저 그런 낭비는 너무 아깝다.
옆에서 선배들을 도울 때 물품을 조금 부족하게 준비하면 제대로 어시스트 안한다고 나무라는 경우가 있지만 차라리 내가 듣는 욕 한 번으로 낭비되는 일회용품 사용을 줄일 수 있다면 더 좋은 자세라고 생각한다. 실실 웃으면서 "죄송합니다. 하나 더 준비하겠습니다" 하고 필요한 양만 추가 준비하는 것이 좋다.
'노 임팩트 맨'처럼 쓰레기나 오염을 만들지 않는 '노 임팩트 닥터'는 사실 불가능하다.
하지만 당연한 듯 쓰이는 의료용 일회용품을 아껴 쓰고 멸균 소독하여 쓸 수 있는 물품은 재활용해 쓰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실천하고 행동하는 지식인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40]편으로 이어집니다.
※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