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하루 종일 사람 피만 뽑으러 다니네요"라는 말과 함께 흡혈귀라는 애증의 별명이 귀에 익은 지 어언 9개월. 소아과에 당도했기에, 아기들의 조막만한 팔뚝에서 피를 뽑는 것도 그리 두렵지만은 않았다.
이전 응급실에서 몇 차례 한 살도 되지 않은 아기들 채혈을 해본 경험이 있어 어렵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79일, 55일 심지어 생후 5일된 아기 채혈을 하는 경우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기들 피부가 투명해서 혈관이 잘 보일 때도 있지만 그만큼 혈관이 너무 작고 약하다 보니 조금이라도 손이 떨리거나 어긋나면 주사 바늘이 금방 빠지거나 혈관이 터져버려 난감했다.
이전 병동에서 일할 때 채혈은 속도가 생명이었다. 여기저기 병실마다 입원한 환자들에서 많은 채혈을 시행해야 했기에 신속함이 중요했다. 채혈을 빨리 마무리해야 다른 병동잡이 밀리지 않고 쉴 짬도 생긴다.
인턴 초기에는 사람을 뾰족한 것으로 찌른다는 사실만으로도 환자에게 괜히 미안했다. 자신이 없어 일부러 바늘 굵기가 얇은 나비 바늘(scalp needle)을 쓰게 된다.
나비 바늘이라 해서 소아의 두피 혈관을 채혈할 때 쓰는 바늘인데 손잡이 모양이 나비 모양이다. 주사기에 붙은 바늘보다 훨씬 얇고 조작이 쉬어 자신감이 없을 때 인턴들이 주로 애용한다. 하지만 그만큼 채혈에 걸리는 시간도 늘어나고 주사기 외에 따로 준비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채혈에 자신감이 붙으면 나비 바늘 없이 주사기만 들고 칼을 휘두르듯 자유자재로 채혈을 한다. 그러던 차 당도한 소아과 병동에서는 모든 환아들의 채혈에 나비 바늘을 이용했다.
가끔 고등학생 환자들이 입원하여 채혈할 때면 다시금 외과병동에서 휘두르던 그 주사기 솜씨를 발휘하고 싶지만 그래도 간호사들의 만류로 다시금 나비 바늘을 이용했다. 소아과 병동은 일반 병동과 달리 채혈 속도보다는 한 번에 잘 뽑는 것이 중요하다. 환아들이 최대한 아프지 않게, 보호자들이 안심할 수 있게 말이다.
여전히 어려운 것이 소아 채혈 검사다. 일단 아기들은 말이 안 통한다. 아무리 겁에 질린 환자도 "움직이지 마세요. 그러면 다른 곳에 찔려요"라고 하면 팔을 부들부들 가만히 놓는다.
아기들은 누군가 억지로 잡는 순간부터 울기 시작한다. 더군다나 옆에서 어머니가 "선생님, 한 번만에 잘 뽑아주세요"라고 하면 갑자기 부담감이 백배 증폭한다. 얼굴에는 땀이 송글송글 가운 안에는 땀이 삐질삐질 배어나온다. 채혈에 자신감이 붙은 10월 말턴임에도 이러한데 인턴 시작을 소아과해서 한 동기들은 어땠을까.
채혈은 말로 설명해도 불가능한 '감(感)'이란 것이 존재한다.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다 보면 점차 눈에 보이는 것이 있고 손 끝 감각이 반응한다. 혈관 위치와 깊이를 짐작하고 조금씩 밀어넣는 주사 바늘을 혈관 안에 무사히 안착시키는 것.
하지만 소아 채혈은 그런 감이 더 특수했다. 어른은 팔에 있는 정맥이 오동통하게 만져지는 경우가 많다. 설사 만져지지 않더라도 노려보면 푸르스름한 주행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병으로 고생하는 환아의 몸 어디에서도 혈관이 눈에 띄지 않는 경우가 있다. 소아 채혈이 어려운 경우 인턴이 아닌 레지던트 선생님이 나선다. 손끝의 감각을 살려 핏줄의 징후라고는 보이지 않는 곳에 주사 바늘이 들어간다.
그렇게 빨간 피가 주사용기 내로 맺힐 때면 신기하다. 소아 채혈에서는 때로 과감한 시도가 아기를 둘러싼 간호사와 보호자의 박수를 얻어낼 때도 있다.
"와~ 선생님 한 번에 됐어요!" 이렇게 채혈하는 입장에서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과감하게 푸욱! 아기야 미안!
[50]편으로 이어집니다.
※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