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인턴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지금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은 진로 문제이다. 환자를 늘 마주하는 임상과를 할 것인지 아니면 서비스과를 할 것인지.
환자를 대하는 데 부담을 느끼는 인턴에게는 환자를 직접 대하지 않는 서비스과가 적성에 맞을 것이다. 영상의학과, 병리과, 진단검사의학과 등이 대표적인 서비스과다.
서젼(외과의) 아니면 피지션(내과의). 서젼은 타고나야 한다고 들었다. 인턴 중에서도 수술실을 편안하게 느끼고 좋아하는 동기들이 있다. 손기술이 좋고 수술을 재밌게 느끼는 이에게 서젼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다.
반대로 책 읽고 공부하는 것이 좋은 이들에게는 피지션이 적합하다. 방대한 지식에 대한 매력과 어려운 진단을 맞춰가는 과정에서 희열을 느낄 것이다.
의사들에게 자신의 전공을 정하는 것은 일생을 결정하는 큰 문제이다.
90퍼센트가 전문의인 한국의 기형적인 의료환경에서는 '일반의'로 지내는 시간은 길어야 종합병원에서 수련받는 5년(인턴 1년, 레지던트 4년)이 전부다. 하지만 '전문의' 자격을 얻어 사는 인생은 은퇴하기 전까지 적어도 30년이란 세월이 보장된다.
인기 있는 전공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지금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과들이 10년 뒤에도 인기 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한편 지금은 젊은 의사들에게 홀대 받는 과들이 미래에는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전공을 선택할 때 사회적 시선이나 시류에 따라 정하지 말고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과,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과를 선택하는 소신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가을에는 인턴들끼리 주고받는 안부 인사에 "너 무슨 과 쓸거니"라는 질문이 빠지지 않는다. 이미 확고하게 자신의 향후 진로에 대한 믿음이 선 인턴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과에 대한 고민으로 골치 아픈 동기들도 있다.
그들 중 외과와 내과 선택의 기로에서 갈팡질팡하던 동기의 글을 허락받고 실어본다.
내과냐 외과냐 그것이 문제로다
외과, 당신은 너무 섹시해. 미쳐버리겠어. 수술방이 다리 아프고 너무 힘든데, 수술방이랑 병동이랑 번갈아 하라면 병동 일만 하고는 못 살겠어.
수술방 마취과 선생님이 "인턴 선생님은 외과할 거지?" 그러셨는데 내가 "아니요, 내과 할 겁니다" 하니까 방 안 모든 사람들이 충격에 휩싸인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임상전임강사 선생님도 뒤를 휙 돌아보시며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 말씀하셨다. "○○야, 외과 의사도 나처럼 결혼할 수 있어. 좀 늦었지만 할 수는 있어."
아. 제길 이런 식으로 나를 외과에 끌어들이지 마. 나 약간 솔깃했어. 결혼할 수 있다고. 짝턴 언니가 그랬지. "네가 내과를 한다고 해서 결혼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결혼이 중요한 건 아닌데 내과 해도 결혼 못할 수도 있긴 한데, 그래도 "나 외과 하겠소"라고 못하는 이유는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내가 외과를 하면 너무 빠져들어서 임상할 것 같아.
외과는 왜 이렇게 섹시한 걸까? 나 정말 만나는 외과 선생님들마다 "외과가 너무 섹시해요"라고 고백하고 싶어 미치겠는데 그러면 그들이 외과의 좋은 점을 주구장창 설명할 것이고, 팔랑팔랑 귀가 얇은 나는 그 말을 듣고 외과를 써버릴 것 같단 말이다.
나는 내과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일지도 몰라. 하지만 나랑 너무 어울리는 외과를 쓰면 안주하는 느낌이야. 사실 내과를 갔을 때 더 두려워. 내가 제일 멍청하겠지. 내가 제일 못하겠지.
하지만 늘 그런 길을 택해왔던 것 같다. 나는 수학과 과학을 못하고, 언어와 외국어를 잘했지만 이과를 택했어. 사회과학대를 갔으면 과 수석을 했을지도 몰라. 의과대학에서는 겨우 따라갔고.
외과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긴 해. 학생 실습할 때도 외과에서는 늘 칭찬받았고 선생님들이 기억하기까지 했어. 내과는 그냥 저냥 겨우 바보를 면한 정도였지.
그래도 "내과 할래." 편하게 살려고 내과 하는 게 아니야. 내과는 어려워. 그래서 흥미진진할 거야. 나는 내과에 없는 독특한 캐릭터이겠지만 외과 교수님의 예언처럼 왕따를 당하지는 않을 거야.
차가운 내과 속에서 활기차게 병동을 누비는 의사가 되어 주지. 자기 주치의가 힘이 넘치면 환자들도 좋아할 거다. 섹시남, 외과 안녕.
의대를 지망하는 수험생들은 의사의 모습이 멋있고 부럽다며 의사가 되면 행복하고 고민이 없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의사가 된 후에도 학생 때보다 더 많은 고민과 더 큰 선택을 해야 할 때가 많다.
내가 의대에 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듯, 의사가 되어도 정말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갓 의사가 된 인턴들은 여전히 '내가 그 과에 선택받아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고민과 '그 전공을 하게 되면 잘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떠안고 있다. 스스로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는 일과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적성에 적합한 일.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진 사람은 인생에서 이미 성공한 이가 아닐까.
인턴 모두가 고뇌하며 이 계절을 보낸다.
[66]편으로 이어집니다.
※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