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 열릴 줄 알았던 굳게 닫힌 응급분만실의 유리문은 이미 6개월째 먼지가 쌓여가고 있다.
하나씩 불이 꺼지기 시작했던 병동은 어느덧 한 층으로, 또 하나의 층으로 번져가며 어둠으로 변해갔고 그 안에 쉴새없이 움직이던 수백명의 의사와 간호사들 그리고 환자들은 전국으로 뿔뿔히 흩어졌다.
올해로 55년, 반 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국내 여성의학의 산실로 꼽히던 제일병원은 오늘도그렇게 불이 꺼져가고 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아무도 이렇게 긴 시간이 될 줄 몰랐던 제일병원의 현재. 하지만 몰락과 재기의 갈림길에 선 그곳에는 아직도 의사와 환자, 간호사가 있다.
떠나간 사람과 남은 사람들. 그들은 무엇을 보고 자리를 지키고 어느 것에 실망해 정든 병원을 떠났을까. 그 갈림길에 메디칼타임즈가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병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제일병원의 본관. 수백명의 의사와 간호사, 환자들이 북적대던 그곳의 불은 이미 절반 이상 꺼져버린지 오래다.
제일병원이 위험하다는 소식이 조금씩 새어나오던 것도 잠시 병원의 재정 상태는 순식간에 도마 위에 올랐고 임금을 둘러싼 노사 갈등은 극단적인 악화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나마 잠시 이를 감내하기로 한 대타협의 결과로 응급 처방이 나왔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는 못했다. 임금 지급이 1년여간 지속되면서 결국 이렇게 마주했던 노조원들까지 하나 둘 병원을 떠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불과 1년여만에 제일병원의 병동은 하나씩 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하나의 병동에서 시작된 것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직원들을 막지 못하면서 한 층 한 층 문을 닫는 병동은 늘어갔다.
결국 2018년 12월 현재. 제일병원은 사실상 호흡기로 연명하는 상황에 놓였다. 병원의 몰락의 시초인 응급실은 이미 문을 닫은지 수개월이 흐르고 있고 무려 300병상이 넘게 불이 꺼지면서 분만 기능도 사실상 중단됐다.
"설마 그렇게까지 되겠어? 에이 금방 해결되겠지. 그렇게 하루하루 버텨온 거에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여성병원이잖아요. VIP도 많았고. 저만 해도 지금 몇 차례나 움직였는지 몰라요. 여기로 갔다가 거기 닫으면 다시 저리로 옮기고 하면서. 이제는 우리끼리 만나도 누구 나갔네 말았네 하는 얘기도 안해요. 그만큼 너무 많이 나가서 이제는 화제도 안되는거죠."
제일병원을 아직 지키고 있는 한 간호사의 말이다. 그렇게 하나둘씩 간호사들이 떠나가면서 제일병원의 상징인 본관은 사실상 건물만을 남겨 놓은 채 개점폐업 상태에 이르고 있다.
저출산을 극복하고자 야심차게 문을 연 여성암센터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병동이 문을 닫고 간호사들이 떠나가면서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된 상태에서 수술을 진행하는 것은 무리다.
그렇게 제일병원은 이제 '병원'의 기능을 잃은채 사실상 '의원'의 기능만을 수행하고 있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곳은 외래센터와 의학연구소 정도에 불과하다. 외래와 입원 중 이제 외래 기능만이 간신히 유지되고 있다는 의미다.
제일병원의 상징과도 같았던 모아센터도 거의 대부분이 운영이 중지된 상태다. 분만이 이뤄지지 않으니 모아센터의 기능도 유지될 수 없을 터. 간신히 1층의 일부 구역만을 유지한 채 환자들의 팔로업만을 담당하고 있는 상태다.
병원과 사생결단을 각오하며 싸웠던 노동조합 사무실. 그 곳도 이제는 을씨년스러울 만큼 조용하다. 그 안에 붙어있는 수십장의 대자보는 '추석'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최소한의 단발마조차 없어진 상황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무엇이 국내 여성의학의 역사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수많은 추측이 분분하다.
누군가는 저출산을 말하고 어느 곳에서는 이사장의 방만한 경영을 지적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곳에 산모와 환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정상화 약속을 믿고 의료진을 신뢰하며 제일병원을 찾았던 환자들은 일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에 병원을 찾지 못했다. 그 약속을 지키려 월급조차 받지 못하며 현장을 지키던 의료진들도 그 가운데서 길을 긿었다.
"산부인과는 약간 다른 과목들하고 느낌이 달라요. 아무리 환자가 많아도 다들 기억할 수 밖에 없는 것이 10달을 함께 하잖아요. 그 아이가 뱃속에서 커가고 산모들이 그 날을 기다리던 순간들을 함께 하는 거에요. 제가 이건 아니다 싶으면서도 병원을 나오지 못한 것도 그 이유가 컸어요. 그 산모들이 다 눈에서 아른거린다니까요."
최근 정든 직장을 떠난 간호사의 말이다. 수개월째 체납되는 월급을 감내하던 그는 제일병원이 분만 기능을 중단하자 미련없이 병원을 나왔다. 더 이상 병원을 지킬 이유가 없었던 이유다.
"저는 그만큼 병원을 믿었거든요. 산모들에게도 항상 그렇게 얘기했어요. 잠깐 시끄러운 것 뿐이고 아이를 만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꺼다 하고. 헌데 분만장을 닫아버리니 전 거짓말을 넘어 사기를 친 셈이 됐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버텨요."
그렇게 저마다의 이유로 병원을 떠나가고 이제 제일병원에는 의료진이 절반도 남지 않았다. 그들을 돕던 행정 직원들도 마찬가지. 다들 평생 직장으로 믿었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구직 활동을 벌이고 있다.
발 딛을 틈 없던 외래 접수실은 이제 한가로이 거닐 정도가 됐고 입퇴원계 등 원무과는 단 한명이 모든 업무를 도맡고 있다.
밀려드는 환자를 감당하지 못해 설치했던 예진실, 설명간호사 데스크는 이미 불이 꺼진지 오래. 이미 환자들마저 떠나버려 곧바로 의료진을 만날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일부 의료진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제일병원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자신을 믿고 따라준 환자를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의료진의 사명감이다.
"나라고 이렇게 앉아있고 싶겠어요. 오라는 곳도 꽤 있었어요. 헌데 환자 얼굴을 보면 못나가요. 그래 이 사람까지는 내가 해결하고 나가야지 하면서. 그러다보면 이런 상황에서도 또 환자가 오고. 그 절실한 사연들을 아니까 그래 여기까진 해야지 하고."
제일병원에서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교수의 말이다. 이러한 이유에는 자신에게 배우기 위해 병원에 들어선 후배들을 향한 마음도 녹아있다. 이름만 대면 어느 병원에서도 탐낼 만한 명의들이 아직 병원을 지키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다.
"나야 나가도 갈 곳이 있지만 레지던트 애들은 무슨 죄에요. 지금같은 시기에 산부인과 지원한 것도 얼마나 용기가 필요했을텐데. 내가 나가더라도 얘들은 다 어떻게든 해결을 해주고 나가야죠. 물론 그 안에 병원이 정상화되서 수련을 마칠 수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현재 제일병원은 12월 중순을 목표로 또 다른 인수 협상자와 논의를 진행중에 있다. 이미 수차례 다양한 인수자들이 거쳐갔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무산된 협의가 이제는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아가는 분위기다.
불꺼진 병동에서 떠나간 동료들을 보며 가슴을 치면서도 환자들을 위해 병원을 지키고 있는 아직은 제일병원 식구인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제일병원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을 갖던 그 날로 돌아가는 것. 환자들의 미소에서 보람을 찾던 그 순간을 다시 맞는 것.
"다들 왜 안나가냐고 하는데 사실 저는 제일병원에 입사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집도 사고 했거든요. 여기에 제 삶이 다 녹아있는 거에요. 스테이션부터 의자 하나하나. 그 안에서 같이 웃고 울던 동료들. 다 제 삶이에요. 나가면 송두리채 내 삶이 지워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 이사장, 경영, 부채 그런걸 다 떠나서 같이 힘내던 그 날들이 다시 왔으면 좋겠어요. 평생 직장으로 믿고 들어왔으니 아직은 막연하게나마 그 희망이 있는거죠."
2018년 12월 현재 1인 3역을 하며 제일병원을 지키고 있는 고참 간호사의 마지막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