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시급한 인공혈관 20개가 18일 오늘 공급되면 수술을 받지 못해 가슴을 졸였던 환자들이 수술을 받을 수 있다. 또 고어사가 지난 15일 정부와의 화상회의를 통해 향후 지속적인 공급을 약속한 만큼 적어도 인공혈관 수술 중단 사태가 다시 벌어지는 일은 없을 듯 하다.
이만하면 해피엔딩인가. 명쾌하게 그렇다고 답하기엔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앞서 리피오돌 사태를 떠올려보자. 지난해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게르베코리아 강승호 대표는 리피오돌 사태에 공개사과를 한 바 있다.
리피오돌은 간암치료에서 대체약이 없는 유일한 CT촬영 조영제로 1999년 국내 등재된 이후 지난해 한국 시장에 가격이 낮다는 이유로 철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가 결국 약가 재협상을 통해 가격인상에 성공했다.
1999년 건강보험에 등재됐을 당시 보험약가는 8470원으로 시작해 2013년 5만 2560원으로 6배 이상 인상됐지만 여전히 원가에 못미친다며 26만원을 요구했고 결국 19만원선에 약가협상을 마무리지었다. 정확히 20년만에 약 30배 이상의 가격인상인 셈이다.
대체 의약품이 없는 상황에서 정부가 협상력을 발휘할 여력이 떨어진 결과다. 지난해 국정감사에 증인석에 오른 게르베코리아 강승호 대표는 "죄송하다"고 입장을 밝혔지만 이미 기존 대비 4배 이상의 높은 약가를 챙긴 이후였다.
이같은 이유로 약가협상을 위해 환자를 볼모로 했다는 윤리적 비난을 피하지 못했다.
리피오돌 사태만이 아니다. 과거 2009년 노바티스 글리백 사태, 2011년 올림푸스 내시경 사태 등 독점권을 보유한 다국적 회사들의 교묘한 수가 인상 전략(?)은 반복되고 있다.
다시 고어사로 돌아와보자. 고어사 또한 결정적인 철수 배경에는 낮은 수가 즉 시장성이 낮다는 이유가 컸다. 철수 당시 서울아산병원 등 대형 대학병원은 5년치 인공혈관을 대량 확보했지만 2년만에 바닥을 드러냈고 결국 수술중단 사태를 맞았다.
이 사태가 터지기 1년전인 지난해 다급해진 대한흉부심장혈관외과학회는 고어사 측에 공문을 통해 한국의 다급한 현실을 알리며 SOS를 청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학회는 단 한번의 회신도 받지 못했다.
최근 식약처, 심평원 등 정부기관 공무원의 경직성, 탁상공론으로 다국적 기업이 철수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뭇매를 맞는 틈에 고어사의 윤리적 책임이 가벼워지는 모양새는 영 개운치 않다.
고어사는 게르베코리아가 그랬듯 인공혈관 공급가격을 높이는 계기로 삼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정부는 인공혈관에 대한 독점권을 지닌 고어사가 원하는 액수를 최대한 맞춰줄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한국 시장 철수 선언 즉, 환자를 볼모로 한 협상에 성공한 또 하나의 선례가 될 듯하다.
여기서 끝이면 차라리 간단하겠다. 다국적 회사의 횡포를 비난하고 규제 방안을 찾자고 얘기하면 그만이니 말이다. 한발 더 나아가 생각하면 고민은 더 깊어진다.
국내 의료진에 따르면 다국적 제약사 및 의료기기업체들은 한국시장을 영양가 없는 시장으로 인식한지 오래됐다. 워낙 정부 규제가 많고 탄탄한 건강보험체계 내 저수가 환경 속에 수익성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형 대학병원 한 외과의사는 "최신 기술력을 확보한 치료재료나 의료기기는 접하기 어렵다. 재고가 쌓이고 땡처리 할때 국내 들어온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국내 의료진의 역량은 이미 세계 속에서 높게 평가를 받지만 저수가 체계 속 최근 기술이 담긴 치료약과 치료재료 및 의료기기는 접하는데 어려움이 있단다.
미국 오바마도 부러워했다는 완벽히 통제가능한 한국의 건강보험시스템 속에는 끊임없이 의료공급자의 희생을 강요하며 마른 수건을 쥐어짜야 운영이 가능한 한국의 저수가 의료환경이 있다.
수십년째 몸담고 있는 한국 의사들도 숨이 차는 이 의료환경을 독점권을 지닌 다국적사가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을터다. 단순히 다국적사의 갑질이라고 비난만 하기엔 이 또한 뒷맛이 개운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