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calTimes
  • 오피니언
  • 이슈칼럼

|칼럼|문재인케어가 '문재인푸어'로 되지 않으려면

좌훈정
발행날짜: 2019-07-08 06:00:50

대한개원의협의회 좌훈정 보험부회장

정부의 자화자찬이 또 시작됐다.

지난 2일 보건복지부는 건강보험 보장성강화 정책, 이른바 문재인케어 시행 2주년 성과를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최근 2년간 약 3600만명이 의료비 혜택을 누렸으며, 구체적으로는 비급여의 급여화 1조4000억원, 취약계층 본인 부담률 경감액 8000억원 등 총 2조2000억원의 환자 본인부담금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언뜻 들으면 의료비의 가계직접 부담금이 줄어들었으니 일단은 좋은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재난적 의료비를 해소하겠다는 당초의 선전과는 달리 대부분이 대형병원의 MRI나 상급병실료, 선택진료비의 급여화에 따른 것이라는 게 문제고, 앞으로 진행될 보장성강화 정책 역시 대동소이하다는 것이 더욱 문제다.

나아가 문재인케어의 가장 큰 문제는 여기에 투입될 재원이다. 정부가 향후 5년간 투입할 42조원 중 절반은 현재 적립되어 있는 건보적립금 20조원이 들어갈 예정인데, 이게 그냥 남아도는 돈이 아니라는 거다. 건강보험 재정은 지난 2000년 건강보험 재정 통합과 의약분업 시행 이후 큰 적자가 발생해 물가 상승률을 훨씬 웃도는 보험료 인상을 통해서 억지로 재정을 맞춰왔고, 의료수가 인상 억제를 통해 허리띠를 졸라맨 끝에 최근 10년 간 조금씩 적립해온 재원이라는 것이다.

지난 수년간 건강보험 가입자 단체들이 보장성 강화를, 공급자들이 의료수가 인상을 요구할 때마다 정부는 건보적립금이 남아있다고 마구 쓸 수 있는 돈이 아니라고 누차 강조해왔다. 즉 저출산·고령화 시대를 맞이하여 노인 인구 및 기대수명 증가, 신약·신의료기술 증가, 의료서비스 욕구 증가 등으로 국민 의료비가 폭증할 것이 예상되는 바 여기에 들어갈 재원을 미리 적립해두는 것이니 함부로 꺼내 쓸 수 없다고 거절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2년 전 정부는 한순간에 말을 뒤집었다. 이전 10년 간 힘들게 쌓아놓은 적립금을 5, 6년 만에 다 쓰겠다고 한다. 이는 긴 겨울을 대비하여 창고에 저장한 쌀을 찬바람이 불기도 전에 술 담그고 떡을 쪄서 다 먹어치우겠다는 거나 다를 바 없다.

영국 NHS의 교훈

자본주의의 효시인 영국에서 사회주의적 의료보험제도인 NHS(National Health System)가 시작된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의 산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은 많은 사상자와 이재민이 발생했다. 전쟁 직후 피폐해진 사회 기반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영국 국민은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는 노동당의 애틀리를 수상으로 선택했다. 이후 보수당도 버츠켈리즘이라는 타협을 통해 NHS를 비롯한 사회 복지정책을 이어나갔다.

문제는 재정이었다. 노조를 기반으로 하는 노동당과 그 지지자들은 복지의 확대를 계속 요구했고 NHS는 1948년 시작 당시 약 4억4000만 파운드의 재정이 소요되었으나 2008년에는 약 1000억 파운드로서 물가 상승을 감안해도 10배 이상 증가됐다. NHS뿐만 아니라 영국 사회 전반의 복지 증가로 인한 재정 적자, 잦은 노조의 파업과 실업률 증가 등은 이른바 '영국병'을 야기했다. 1979년 노동당의 5년 집권을 무너뜨린 마가렛 대처는 파업에 강경 대응하고 재정 지출을 줄이는데 성공하여 무려 20년동안 보수당 집권을 이룩했다.

그럼에도 1997년 노동당 토니 블레어 집권 이후 다시 늘어나기 시작한 NHS 예산은 영국의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되고 있는데, 국가 전체 예산의 거의 1/5을 여기에 쏟아 붓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NHS는 의료수요의 지속적인 증가와 오랜 진료 대기시간, 유능한 의료진의 해외 유출 등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현 정부의 보건의료정책을 주도하는 관료들의 상당수는 영국의 NHS를 공부하고 이를 벤치마킹 하려고 한다는 얘기도 있는데, 과연 이런 상황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쁜 우리 상황

영국 NHS와 비교하면 우리의 상황이 더 좋지 않다. 영국의 경우 우리보다 인구고령화 속도가 둔화된 상태이며, 70년 간 제도운영 경험을 통해 적립된 재원을 한꺼번에 써버리거나 하는 무모한 계획을 세우지는 않는다.

또한 NHS는 의료전달체계를 통해 일차진료(Primary Care, PC))와 이차진료(Secondary Care, SC)를 구분하고 있고, 일차진료를 담당하고 있는 각 지역의 일차진료의사(General Practitioner, GP)들이 의료 이용의 문지기 역할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과잉 수요를 줄이거나 합리적 이용을 도모하고 있다. 또한 NHS에 포함되지 않는 민간의료기관이나 자선기관 등을 허용하여 일부 수요를 해소하고 있다.

작금 문재인케어의 경우 발표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위해 적립금 20조원을 몇 년 만에 다 써버리고 나면 이후에 늘어난 재정 수요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대책이 없다. 급속도의 보장성 강화는 의료수요의 증가를 촉발시켜 당초 정부에서 추계한 재원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 현재의 보장성 강화 플랜이 대형병원에 초점이 맞춰져있는데다 의료전달체계 역시 갖추어져있지 않아 의료비 폭증을 제어할 방법이 사실상 없다.

우리나라는 건강보험제도 도입부터 이러한 전달체계가 마련되지 못했고 이미 많은 전문의들이 일차의료를 담당하고 있어 NHS와 같은 문지기 제도로 가기는 어렵다. 다만 현행 제도 하에서라도 합리적인 의료 이용을 위해 일차의료에 대한 보장성 강화나 각종 지원 대책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상급종합병원 위주로 보장성 강화가 이뤄지면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대형병원 쏠림 현상과 그로 인한 재원의 소모를 악화시키게 된다.

더욱 황당한 건 보장성 강화에 찬성하면서도 아무도 비용을 더 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건강보험 가입자 단체들은 보험료 인상에 반대했고, 기획재정부는 국고지원 확대를 반대했다. 이를 조율하고 중재해야 할 보건복지부가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결국 지난 달 28일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에서 보험료 결정이 무산되었다. 당장 내년에 건강보험료를 얼마나 내야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불과 나흘 뒤 문재인케어 2주년의 '성과'를 발표한 것이다.

아무리 건강보험 보장성을 확대한다고 해도 건강보험료가 임금이나 물가상승률 이상으로 오른다면 국민들이 만족하기 어렵다. 저출산·고령화 사회에서는 보험료를 낼 근로자들이 줄어들고, 보험료를 올리면 기업의 부담이 올라간다. 영국 NHS외에도 NHI(National Health Insurance)를 운용하고 있는 독일, 네덜란드 등과 그 중간 형태를 취하는 프랑스도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보험료 인상이나 보장성 강화에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국민의 3분의2가 가입하고 있는 민간(실손)보험을 통해서 부족한 보장성을 이미 상당부분 메우고 있다.

문재인푸어가 되지 않으려면

하우스 푸어(House Poor)라는 말이 있다. 비싼 집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무리하게 은행 대출 등을 받아 자기 소득에 비해 훨씬 고가의 집을 구입했다가 그 이자에 치여 힘겹게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우리의 여러 사회보험 제도들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보장성이 충분한 건강보험이라도,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보험료나 세금이 들어가고 그로 인해 국가는 물론 가계에 부담이 된다면 그건 좋은 제도가 아니라 나쁜 제도다.

대통령의 이름 석 자가 들어간 제도가 '푸어(Poor)'라는 비아냥을 듣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당장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

첫째, 의료계와 충분히 상의하여 필수의료 위주로 의학적인 보장성 강화가 이뤄져야 한다. 아울러 적절한 보상기전이나 급여기준 마련을 통해 의료의 양적인 팽창뿐만 아니라 질적인 제고가 동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저출산·고령화 시대와 국민생활수준 향상에 따르는 의료이용 증가를 예상하여 충분한 재원 마련 대책을 세워야 한다. 사회보험의 원리에 따라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야 하고 수익자 부담의 원칙 또한 지켜져야 한다.

셋째,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는 단순히 의료비의 가계 직접부담만 줄여주는 것이 아니다. 의료서비스 이용자가 원할 때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접근성, 적시성도 중요한 보장이다. 이를 위해 우리나라의 특성에 맞는 합리적인 의료전달체계를 마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