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처 직원과 대화를 하다가 깜짝 놀랐다. 공무원의 입에서 "관치 행정이 너무 심하다"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허가 업무를 맡은 규제 기관 공무원의 입에서.
지난 달 미국 출장에서 수면 유도제 멜라토닌이 편의점에서 팔리는 걸 봤다는 말이 그의 속내에 불을 붙였다.
식약처는 전문약으로 분류된 멜라토닌의 개인 사용 목적의 수입이나 판매를 허용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멜라토닌 복용을 위해선 처방전을 끊어야만 한다. 멜라토닌의 직구는 불법이라는 뜻.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검색창에 '멜라토닌'을 넣으면 '직구'가 자동완성으로 따라 붙는다. 그만큼 직구 구매자가 많다는 것. 블로그에서도 멜라토닌 직구 방법 소개와 사용 후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굳이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해외 직구를 선택하는 저간 사정은 뻔하다. 해외에서 건강기능식품으로 팔릴 정도로 비교적 부작용이 적은 편인데도 한국에서는 일반의약품도 아닌 전문약으로 허가가 나 접근성이 떨어지는 까닭이다. 이런 판단엔 정보화 시대에도 환자들이 스스로 혜택-위험을 판단할 수 없다는 인식이 기저에 자리잡고 있다.
식약처 직원은 "법 감정처럼 규제 과학도 국민의 정서와 동떨어져 있는 부분이 많다"며 "지하철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것도 불법이지만 사실상 단속도 없고 단속할 수도 없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규제를 통해서 세상의 질서를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거대 정부 만능주의'가 아니라면 민간에 이양하거나 전문가 집단에 맡길 부분은 폭넓게, 그리고 개인의 선택에 책임을 부여하는 식으로 가야한다는 뜻이었다.
멜라토닌을 예로 들었을 뿐 국민의 규제 감정과 동떨어진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재생의료를 취재하기 위해 간 일본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재생의료란 손상된 인체 세포와 조직을 대체하거나 재생해 정상 기능으로 회복시키는 의료기술을 뜻하는데 일본은 2014년부터 법의 테두리 안에서 '안전성'이 확보된 재생의료 임상, 제품을 폭넓게 허용하고 있다.
국내에도 이같은 재생의료를 다루는 '첨단재생의료의 지원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안'이 계류중이긴 하지만 아직 통과 여부는 불투명하다.
재생의료를 받기 위해 암 환자를 대동해 일본 현지에 온 모 기업 대표는 기자에게 "기업을 해 봐서 안다. 한국은 1%의 부작용 가능성 때문에 100개의 규제를 만드는 나라"라고 하소연했다.
비슷한 말을 제약사 대표로부터도 들었다. 미국과 한국에서 치매 신약을 개발 중인 A 업체 대표는 FDA에서 환자 안전성만 확실하면 임상 진행에 자유를 부여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했다. 환자를 의료기관까지 '모시고' 오면 안 된다는 조항 때문에 정작 임상이 아닌 거동이 불편한 치매 환자를 대동하는 방안에 쩔쩔 매고 있었다.
물론 환자의 생명에 직결된 의약품이나 의료에 있어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생명과 무관하고 정부 개입이 비효율적인 부분에서도 굳이 '명분'을 내세워 규제의 범위로 포괄하려드는 순간 개인도, 사회도 책임론에 발목을 잡혀 불편한 눈치 게임만 하게 된다.
정부가 지향하는 게 '규제 강국'이 아니라면, 의료 영역에 있어서도 개인 선택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정부의 역할은 허가제를 통한 안전성 확인에만 그치고 나머지는 의료진이나 환자 선택에 맡기는 폭넓은 자유와 책임 부여가 사회적 비용 절감과 공익에 더 부합할 수 있지 않을까.
규제를 도입할 때는 항상 해외 선진국 사례를 들먹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들어본 기억이 없다. 이는 국민을 개몽의 대상으로 보는 선민사상에 다름 아니다. 규제 당국 공무원의 입에서 "관치 행정이 너무 심하다"는 말이 나왔으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