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의학계가 개발한 만성질환 관리 가이드라인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를 꼽으라면 바로 평가항목에 등장하는 ASCVD Risk Calculator(동맥경화성 심뇌혈관질환 위험평가도구)라는 용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심혈관 위험도를 평가할 수 있는 일종의 계산기인데, 의사가 아니라도 누구든지 접속해 간단한 개인정보(연령, 성별, 인종, 지질수치, 당뇨병 유무, 혈압 수치 등)를 입력하면 10년내 심혈관 위험도를 알 수 있다. 자신의 위험도를 상담을 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셈이다.
이런 직관적이고 쉬운 계산기 덕분에 미국의학계는 이 도구를 만성질환자들의 위험도평가에 보편적으로 쓰고 있다. 그 덕분에 환자들의 질병 인식도는 많이 올라가 있다. 궁극적으로 예방의 역할도 한다. 이런게 가능했던 것은 미국 정부의 지속적인 코호트 투자와 의학계의 협력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도구가 국내에도 개발돼 있다는 것을 아는사람은 드물다. 아직 미국처럼 범용적인 평가도구로 사용되고 있지 않을 뿐 꾸준히 개발되고 있다. 그 역할을 주도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연세의대 예방의학교실 김현창 교수다.
"순환기 내분비 분야의 역학을 하는 몇 안되는 연구자"
김현창 교수는 임상의사가 아닌 역학 연구자다. 예방의학분야에서 역학을 전공했고, 그 중에서도 비감염병 분야인 만성질환 역학을 선택했다.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순환기대사 분야가 주전공(주연구 영역)이다. 불과 몇년전까지만해도 역학을 한다면 대부분 암분야를 꼽았지만, 김 교수는 국내 몇 안되는 만성질환 영역 역학 연구자다. 그렇다보니 그의 연구는 늘 관심을 받고 있다.
실질적인 연구 스펙트럼은 더 넓다. 김 교수는 "심뇌혈관질환의 선행질환이 고혈압, 당뇨병, 이상지질혈증, 비만 등 대사성 만성질환인 만큼 이들 분야의 역학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심장, 내분비, 지질 등 유관학회를 동분서주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학계에선 이미 유명인사가 된지 오래다.
김 교수는 지난 10여년전부터 심혈관분야 역학연구에 본격 매진해왔다. 물의 기원을 찾듯 왜 어떤 이유로 한국내 심혈관질환이 발생하는지 찾고 있다. 그러다가 2013년 연세의대 심뇌혈관 및 대사질환원인연구센터가 복지부 질병원인센터로 지정받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심혈관위험 예측평가모델도 개발하기 시작했다.
5년이라는 짧은기간 정부투자 연구였지만 그 성과로 약 1만2000명에 달하는 심혈관 코호트를 구축했고,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역학논문도 150편 가량 출간했다. 그의 논문에는 우리나라 심혈관발생 기원을 대략적으로 찾을 수 있다. 그 덕에 만성질환 위험도 평가도구까지 개발 할 수 있었다.
지방간, 골다공증, 당뇨병, 관상동맥 둥 4가지 만성질환 위험도를 예측할 수 있는 질병예측평가도구가 그것. 나이, 체중, 성별, 흡연, 동반질환 등 몇가지 정보를 입력하면 지방간, 골다공증, 당뇨병이 발생할 확률을 계산해주고, 관상동맥질환은 10년 위험도를 계산해준다. 이른바 한국형 ASCVD 위험평가도구 모델인 셈이다.
현재 김 교수가 개발한 평가툴은 몇몇 국내 진료지침에도 등재돼 있다. 만성질환 1차 진료지침서을 비롯해 심장관련 가이드라인에서도 사용해 볼 것을 권고하는 등 성과를 인정받았다. 다만 아직 임상에서 널리 활용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 이유로 김 교수는 검증이 좀 더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떤 평가도구든 검증이 중요하다. 범용적으로 쓰기 위해서는 많은 임상이들이 공감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검증이 필요한데 일차적으로 코호트가 많지 않은 우리나라 환경에서는 오래걸릴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심장병 예측모형을 위한 별도의 코호트를 만들 필요는 없지만 심혈관질환 위험도를 연구할 수 있는 큰 코호트는 최소한 몇개는 있어야 서로 교차 검증을 해볼 수 있다. 앞으로는 이런 부분을 연구자들, 학계와 협력할 계획"이라고 피력했다.
그는 한국형 심혈관위험도 평가도구가 개발되면 무엇보다도 임상의들의 진료부담이 줄어들고 심혈관질환 환자들의 질병인식률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고령화사회로 만성질환자가 늘어나는 현시점에서 반드시 개발돼야 하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개발의 고삐를 늦추면 안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오히려 미국처럼 환자 한명당 30분씩 상담할 수 있는 진료환경이라면 특별한 도구가 없더라도 질환 관리를 할 수 있고 환자들의 질병인식을 높일 수 있지만, 많은 환자가 병원을 찾는 우리나라 환경에서는 자동화된 것으로 점수를 내주면 의사나 환자나 더 결정을 내리기 쉬워질 것이고 의사부담은 줄 것"이라고 말했다.
“선진국은 50년 데이터 준비중....역학연구에 대한 정부의 지속적인 관심이 중요”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와 학계의 투자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피력했다. 그는 "미국의 경우 ASCVD 위험평가도구는 이미 널리 활용되고 있다. 또한 평가툴의 보정연구도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모두 지속적인 정부의 연구비 지원이 가능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나라도 역학연구분야의 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김 교수는 "연구 환경이 많이 개선이 됐지만 여전히 질병예방에 대한 연구비 투자는 단기과제에 집중돼 있고 그렇다보니 많은 시간과 돈을 써야하는 역학연구는 여전히 찾기 힘들다"면서 "역학은 매우 오려걸리는 학문인데 긴호흡이 필요한 연구에는 부담을 주는 현재투자 방식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그는 "또 그나마 연구도 결과가 부족하면 부족하다고 중단되고, 좋은 결과가 나오면 나왔다고 중단되기 일수인데 이런 환경에서 좋은 역학 연구가 나오기는 것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국가적으로 필요한 과제의 경중을 나눠 지원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자칫 연구자의 의지도 위축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우수한 연구자들이 10~20년짜리 장기 프로젝트는 기획조차 하지 않고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국가적으로 꼭 필요한 연구라면 실적과 상관없이 투자를 하는 선택과 집중전략도 필요할 것이라고 제시했다.
다만 연구자들도 변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지원으로 다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우선 기존의 가용 데이터를 이용해 충분히 결과를 내야 하고 달라진 기술을 접목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 이를 테면 같은 사람을 계속 추적 관찰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는 만큼 모바일 등과 같은 새로운 기술을 접목하는 자세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가 역학자로서 하고 싶은 말은 역학 연구를 잘하는 국가가 질환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대표적인 선진국인 미국, 유럽, 일본만 보더라도 50년간 추적관찰하는 역학연구가 있다. 우리도 있지만 이런 연구 앞에서는 명함도 못내민다"며 "의술은 전 세계적으로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런 우수성을 뒷받침 하기 위해서는 역학 연구가 뒤따라 줘야한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질환을 정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