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성 연구서 인플루엔자 항체 생성 실패 가능성 상승 지적 노출 시간 조사 관건…접종 사업 고질적 문제들 다시 도마 위
|메디칼타임즈=이인복·최선 기자| 백신 유통 과정의 문제로 올해 독감(인플루엔자) 백신 접종 사업이 전면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면서 현장에서는 큰 혼란과 더불어 책임론이 대두되고 있다.
과거 안전성 연구 등을 감안하면 상온 노출시 사실상 '물백신'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500만명 분의 폐기 가능성이 높은 상황. 이로 인해 의료계에서는 예방 접종 사업의 고질적인 문제들이 드디어 터져나온 것이라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백신 상온 노출로 접종 사업 중단…백신의 안전성은?
질병관리청은 22일 독감 백신 일부에 문제가 생긴 것을 발견해 국가 필수 예방 접종 사업(NIP)을 일시 중단한다고 밝혔다.
대상 백신은 13세에서 18세까지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총 500만 도즈로 일부 물량에 문제가 있다는 신고로 인해 조사가 시작됐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NIP 조달을 맞은 의약품 도매업체가 각 지역으로 물량을 배달하는 과정에서 상온에 노출된 정황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질병관리청은 이 백신들의 상온 노출 경위와 시간, 품질 이상 여부를 약 2주간 조사해 폐지와 접종 재개 여부를 결정한다는 방침이다. 안전성을 다시 점검하겠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과연 백신이 상온에 노출될 경우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세계백신학회지에 게재된 연구를 보면 이후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지난 2017년 세계백신학회지(Vaccine)에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상온에 노출됐던 백신으로 인한 이상 반응과 효능에 대한 대규모 연구 결과가 게재됐다(10.1016/j.vaccine.2017.11.083).
백신 이상반응 보고 시스템(VAERS)의 데이터를 조사한 이 논문은 백신의 냉장 유통 시스템 즉 콜드 체인에서 벗어났던 백신이 어떠한 부작용을 일으키는지를 집중 분석했다.
총 476건의 이상반응 보고서를 검토한 결과 백신은 15분만 상온에 노출돼도 손상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인플루엔자 백신의 경우 상온에 노출된 것 만으로 심각한 이상 반응(AE)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던 것으로 분석됐다.
그러나 그 효능은 크게 떨어지는 것(influenza vaccine failure)으로 조사됐다. 사실상 인플루엔자 백신으로의 효과를 잃어 '물백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500만 도주의 독감 백신도 사실상 폐기의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미 백신의 효능에 대한 의구심이 팽배해져 있는 상황에서 이 백신을 그대로 유통한다는 것은 질병관리청 입장에서도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태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제조상 문제가 아닌 온도 유지가 안된 공급의 문제니 만큼 안전성 부분에 초점을 두고 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식약처, 노출 시간에 따라 재사용 가능성 열어놔
하지만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재사용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은 열어두는 모습이다. 노출 시간에 따라 일정 부분 다시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는 것이다.
식약처 관계자는 "생백신이든 사백신이든 바이러스의 활동 특성이 백신에 고스란히 담긴다"며 "온도가 올라가면 바이러스의 활동이 줄어드는 것처럼 생물학적제제에 해당하는 백신은 저온 유통이 정석"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다만 어떤 시점에서 어느 정도 노출이 돼야 백신의 효과가 줄어든다는 정확한 데이터는 없다"며 "알려진대로 5분 가량 노출된 정도라면 크게 우려할 수준은 아니라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식약처 및 질병관리본부가 7월 작성한 백신 보관 및 수송 관리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냉장 유통과 보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상온 노출 시 재사용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주말이나 휴일동안 정전이나 냉장고 기능 이상이 발견되거나 부적절한 백신 보관의 기간을 알 수 없는 경우 가이드라인을 통해 대부분 백신이 일시적인 온도 상승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제시했기 때문이다.
약독화 생백신은 손상을 쉽게 받을 수 있으므로 사소한 문제라도 보관상의 문제는 백신을 공급한 회사와 상의가 필요하다는 전제를 달기는 했다.
이어 식약처는 "백신 회사에 재사용 여부를 확인하고 재사용 여부가 결정될 때까지 따로 보관하라"며 "백신 보관 장비의 기능 이상이 발생한 경우, 백신 관리 담당자 혹은 관리자에게 즉시 통보하고 백신 상태를 백신 공급회사와 상의해 재사용 여부를 결정하라"고 권고했다.
즉 실온 노출 정도에 따라 재사용 가능성도 있다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직사광선 노출이 얼마나 이뤄졌는지가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식약처 관계자는 "수두백신이나 자궁경부암 백신, 로타바이러스 백신 등 약독화 생백신은 일광에 노출되면 백신 역가가 떨어질 수 있다"며 "따라서 백신 전용 냉장고에 보관했다고 해도 냉장고문이 투명 유리로 된 것이라면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접종 중단 사태 책임론 부상 "접종 사업 고질적 문제"
이처럼 백신 유통 문제로 접종 사업이 전면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면서 이에 대한 책임론도 거세게 일고 있다.
특히 올해의 경우 코로나 장기화에 따른 이른바 트윈데믹에 대한 공포로 어느때보다 독감 백신에 대한 수요가 높은데다 이로 인해 이미 공급 차질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른 상태기 때문이다.
경기도 일산의 A소아청소년과 원장은 "매년 수많은 문제가 터져나오는 접종 사업을 아무런 개선없이 그대로 되풀이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인재(人災)라는 의미"라며 "민간 의료기관에서 접종의 60% 이상을 담당하는데 정부가 물량을 싹쓸이한 것부터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분명하게 수요가 급증할 것을 알았는데도 선심성 정책을 위해 보건소에 백신을 밀어주면서 이미 시작부터 접종 사업이 꼬여버렸다"며 "제대로 분배가 이뤄졌다면 60%가 넘는 민간 접종 기능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지금의 혼란은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예산은 쓰지 않고 선심성 정책을 남발하면서 이러한 문제가 나왔다는 지적도 있다.
필요한 예산을 충분히 배정하고 접종 대상을 늘렸어야 하는데 한정된 예산으로 급격하게 500만명 이상 무료 접종을 선언하면서 계약 구조 자체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는 것.
실제로 올해 독감 백신의 조달가는 10410원. 현재 일선 의료기관에 납품되는 가격이 1만 7천원에서 2만원대라는 점에서 사실상 반토막 수준이다. 결국 제대로된 제약사와 도매업체가 참여하는데 한계가 있었다는 지적이다.
전문과목 의사회 임원인 B내과 원장은 "이번에 논란이 된 의약품 유통업체가 올해 처음으로 백신 조달에 입찰한 업체로 알고 있다"며 "워낙에 조달가를 후려쳐 놓으니 콜드체인의 개념도 희박한 이러한 생소한 업체가 입찰되는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일각에서는 고질적인 백신 접종 사업의 민낯이 이번에 드러난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상온 노출의 문제가 이제서야 이슈가 되었을 뿐 만연하던 일이었다는 비판이다.
B내과 원장은 "상온 노출이 이번에야 문제가 됐지만 사실 덤핑치는 병의원들을 보면 이 정도 일은 약과였다"며 "백신은 접종 직전 전용 냉장보관함에서 꺼내 주사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러한 병의원들을 가보면 빠르게 접종하기 위해 수백병씩 미리 까놓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꼬집었다.
아울러 그는 "이러한 문제를 지적할때 뒷짐을 지고 있던 것이 정부"라며 "이제와서 호들갑이지만 사실 언젠가는 크게 한번 터질 문제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