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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의학자들의 임무

발행날짜: 2020-10-26 05:45:50

이인복 의약학술팀 기자

독감 유행 시즌이 오기도 전에 백신을 둘러싼 논란이 하루가 멀다하고 이어지고 있다. 혹자의 말대로 말도 많고 탈도 많다.

본격적인 접종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상온 노출 백신 유통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르더니 이물질 논란에 이어 이제는 사망자가 30명을 넘어서며 접종 중단까지 논의된다.

사실 독감 백신 접종은 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사업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백신 공급 차질과 덤핑 접종 등 의료계 내부에서의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을 뿐 이처럼 사회적 파장으로까지 이어진 예는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그 파장은 사실상 전국을 뒤덮고 있다. 백신 제조부터 유통, 접종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넘어 이제는 사실상 정쟁으로까지 불씨가 번져가고 있다.

온 나라가 대혼란으로 빠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진화하기에 앞서 책임론부터 제기되고 있는 셈이다. 서로 다른 주장과 근거들이 나오다 보니 이제는 무엇을 믿어야 하느냐는 토로도 나온다. 바야흐로 불신의 시대다.

문제는 이러한 대혼란을 정리할 수 있는 유일한 진화(鎭火) 기전인 과학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상온에 노출된 백신이 과연 효능을 발휘할 수 있는지, 현재 사망한 접종자들과 백신과의 인과관계, 향후 접종을 지속해야 하는지 등 모두가 궁금해 하는 이 문제를 풀어줄 유일한 통로는 과학 뿐이다.

이 문제는 여아간 정쟁으로 풀수 없으며 사회적 합의나 논의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오로지 과학적 근거만이 불신으로 뒤덮혀 가는 독감 백신 접종 사업의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 의학자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지금의 의학계가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는 여전히 물음표가 달린다. 일단 국내 최고 전문가 단체인 대한백신학회는 이같은 이상 반응에도 접종을 지속해야 한다는 공식 의견을 냈다.

사망 사례가 지역적으로 국한되지 않으며 제조사와 생산고유번호가 다르고 발현 증상도 상이한 만큼 인과 관계가 약하다는 것. 따라서 혜택과 위험을 고려할때 적어도 고령자, 만성질환자 등 고위험군은 백신 접종을 지속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는 감염학회 등 상당수 전문 단체들의 의견과도 방향을 같이 한다.

그러나 의료계 대표 중앙 단체인 대한의사협회는 백신 접종 잠정 중단을 권고했다. 국민들의 불안이 가중되고 있으며 의료기관들도 접종을 망설이고 있는 만큼 적어도 일주일간 독감 백신 접종을 유보해야 한다는 권고다.

의료계를 대표하는 전문가 단체와 중앙 단체가 사실상 서로 다른 해법을 내놓은 것. 불신을 걷어내야 할 막중한 역할을 갖는 과학자들이 되려 혼란과 불신을 초래한 셈이다.

그러한 면에서 누가 제시한 방안이 옳을 것인가에 대한 평가와 분석은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혼선에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 사실이다.

전국이 불안과 불신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지금 적어도 의학자들이 의견을 내고자 했다면 명확한 근거와 방향성을 가지고 하나의 목소리를 냈어야 한다. 물론 창구도 단일화하는 것이 수순이다.

성급하게 목소리를 쏟아내기 보다는 전문 학회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던, 의학계 중앙 학술단체인 대한의학회의 이름으로 내던, 의료계 중앙 단체인 대한의사협회가 대표하던 이 의견서와 권고문이 나오기까지는 전문가들이 근거를 종합하고 논의하는 과정이 수반되는 것이 필수적인 절차다.

이 절차가 없다보니 전문가들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국민들의 불안과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정책적 결정을 해야 하는 정부 또한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쉽지 않아진 것도 사실이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목소리라는 근거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대한의사협회를 비롯한 의료계가 늘 부르짖는 목표가 있다. 바로 국민의 신뢰와 전문가로서의 권위다. 하지만 하나의 사안을 놓고 서로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데 어떤 말을 신뢰하라고 할지 의문이다.

전문가로서의 권위 또한 마찬가지다. 국내 최고 권위의 학술 단체인 의학회의 의견을 의료계 대표단체인 의협이 뒤짚으며 권위를 논할 수 있을까. 차라리 한 발 늦더라도 명확하고 뚜렷한 근거와 방향성을 가진 책임감 있는 걸음을 딛어야 한다. 그것이 불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의학자들의 임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