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12월23일) 정경심 교수의 1심 재판 결과가 발표됐다. 입시비리 관련 공소 사실에 대해 모든 혐의가 인정됐다. 작년 9월 당시 대한의사협회, 대한소아청소년의사회 등은 입시비리에 대해 조민씨의 퇴교를 요구했고, 5천명 이상의 의사들이 자발적으로 서명했다. 그 긴 시간이 지나 비로소 일단락된 것이다. 재판 결과가 발표된 후 어떤 분이 '사실이 사실의 지위를 찾는데 1년이 걸렸다'고 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지만,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준다. 사실보다 더 권위가 있는 뭔가가 있다는 현실이 말이다.
필자는 2019년 7월부터 식약처의 부실한 의약품/의료기기 안전성 관리 등에 대해 1인 시위를 했다. 내부에서 여러 차례 문제제기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크게 문제 제기한 것 중 하나는 의약품의 시판 후 안전관리 정보의 핵심인 PSUR(Periodic Safety Update Report)을 전혀 검토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를 검토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미국의 FDA, 유럽의 EMA 등의 시판 후 조치를 그대로 copy & paste 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PSUR을 검토하지 않는 것은 필자가 1인 시위 후 의약품심사부장에게 가장 크게 항의한 내용이기도 했고, 그 자리에서 의약품심사부장 스스로도 잘못했다고 인정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식약처는 공식적인 답변서에는 PSUR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그 때 필자는 참 큰 충격을 받았다. 사실을 인정하지 않다니! 이런 사람들과 무슨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2019년 9월 식약처는 필자에게 3개월 정직 징계를 내리고, 그 뒤에는 해고했다. 징계 사유는 공무원으로서의 품위를 훼손했다 등이었다. 필자가 훼손했다고 하는 공무원으로서의 품위는 과연 무엇일까? 진실을 가리고 조직을 보호하는게 공무원의 품위인가?
2019년 10월 필자는 명백한 사실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식약처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식약처 고위공무원들을 직무유기로 고발했다. 3일간 검찰에 가서 고발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했고, 증거자료를 정리해서 모두 제출했다. 그런데 검찰이 (아마도 바빠서겠지만) 필자의 고발 건을 경찰로 넘기더니 올해 8월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다. 이에 필자가 요청해 받은 경찰의 수사 내용은 고작 몇 페이지에 불과했고, 피고발인이 얘기하는 내용을 그대로 몇 줄 받아 적은 것이었다.
그 수사보고서를 보면서 식약처의 임상시험계획서 검토 매뉴얼이 생각났다. '무엇을'만 있고, '어떻게'가 없는 매뉴얼을 보면서 초등학교 과학실험계획서도 이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부실한 수사보고서를 보면서 마피아 게임도 이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발인의 고발 내용을 확인하는 수사가 아니라 피고발인이 얘기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 적을거라면 수사가 왜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식약처와 경찰이 한통속이 아니라면 말이다.
2020년 국정 감사에서는 리아백스주의 부실한 허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다. 당시 허가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리아백스주 회사인 젬백스로 이직하고, 허가 보고서 자체가 없는 등 수상한 부분이 많이 있었다. 이에 식약처는 내부 감사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나도록 아무 발표가 없다. 필자에 대한 내부 감사는 3일만에 끝냈던 식약처가 말이다. 문제를 제기했던 국회의원도 더 이상 follow-up을 안하는지 추가 조치가 전혀 없다.
이러는 사이 젬백스는 정부의 '치매극복연구개발사업' 지원과제로 선정됐다. 이제 놀랍지는 않지만 여전히 화는 난다. 많은 국회의원들이 문제 제기하기만 하고 follow-up을 하지 않을 때 이렇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칼을 잠깐 빼서 칼 자랑만 하다가 칼집에 도로 꽂는 문제제기라면 차라리 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 칼에 헛된 희망이라도 갖지 않도록 말이다.
식약처는 필자가 1인 시위를 통해 요구한 임상시험 중 안전성 정보인 DSUR(Development Safety Update Report) 검토에 대해서 2020년부터 시행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이제 2020년이 1주일도 안남았는데 감감무소식이다. 실리콘겔 유방 시술 후 발생하는 역형성 림프종에 대해서 환자등록연구를 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역시나 감감무소식이다. 그들은 거짓말을 한 것이다.
필자가 식약처에서 일하기 전까지 필자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은 상식이 통하는 사회였다. 사실이 힘이 있는 사회였다. 그러나 식약처에서 일하면서, 징계와 해고를 받으면서,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사실보다는 거짓말이, 조작된 위조가 더 힘 있는 사회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특히 공직사회에서 말이다. 사실과 진실이 힘이 없다는 것만큼 절망적인 것은 없다. 거짓이 힘있는 사회에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이런 필자에게 사실이 사실로서의 권위를 찾은 어제의 재판 결과는 큰 위로와 힘이 된다. 아마도 필자에게뿐만은 아니었으리라. 2021년, 사실의 힘을 믿고, 더 열심히 싸우자고 스스로를 격려해 본다. Happy New Ye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