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동안 고생해서 개발하면 뭐합니까 아무도 사주질 않는데. 수백억대 국책 과제가 계속 나오는데 실제 시장에 국산 제품이 없는 이유가 있어요. 안사니까요."
대규모 국책 과제에 선정돼 수년에 걸친 개발 끝에 수입에 의존하던 제품을 국산화하는데 성공한 의료기기 기업 임원의 말이다.
이 기업은 국책 과제가 끝난 뒤에도 자체 개발 자금을 추가로 투입하며 결국 국산 제품의 양산에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판매 대수는 한자리 수에 불과하다.
국산 제품이 드디어 나왔다며 팡파레를 울리던 홍보하던 정부는 국산 제품에 대한 최소한의 판로를 열어달라는 이 기업의 요구에 아무런 답이 없다. 4차 산업 혁명과 맞물려 정부가 차세대 먹거리로 수없이 언급하는 의료산업 활성화의 현주소다.
실제로 정부는 최근 수년간 융복합 차세대 의료기기 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천명해 왔다. 이른바 차세대 먹거리 발굴을 위한 3대 중점 사업의 일환으로 예산 또한 수조원대가 투입되고 있다.
이 사업의 주요 골자 중 하나는 의료기기의 국산화다. 국내에 유통, 사용되고 있는 대부분의 첨단 의료기기가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규모 연구개발(R&D)자금을 투입해 국산화를 도모하겠다는 복안이다.
수조원대 예산 투입 소식이 계속해서 전해지고 있는 지금. 실제 의료기기 기업들의 반응은 시큰둥하기 그지 없다. 일부에서는 또 다시 성과없는 예산 따먹기가 시작됐다는 얘기도 흘러 나온다.
정부가 예산을 투입하겠다고 공언한 분야들을 보면 수년전의 발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일부는 아예 판박이 수준으로 똑같다. 이미 수년전에도, 그 전에도 같은 이유로 막대한 예산이 투입됐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 제품들은 어디에 가고 의료기관에서는 왜 계속해서 수입 기기들만이 보이는 걸까. 일례로 내시경을 들어볼 수 있다. 실제로 내시경 국산화에 도전한 기업들은 수도 없이 많다. 정부도 대규모 국책과제들을 쏟아내다 보니 삼성그룹이나 현대그룹 등 대기업들까지 참여해 기대감을 높인 적도 있다.
하지만 이들 대기업들도 예산 지원이 끝나는 시점에 모두 포기를 선언하고 개발을 중단했다. 무슨 이유가 있었을까. 이들 기업과 국책 사업을 함께 추진했던 의과대학 교수는 판로를 지적했다.
역량과 예산을 집중해서 올림푸스 제품에 비해 비록 우수하진 않더라도 적어도 열등하지 않은 제품을 만든다고 해도 도대체 팔 곳이 없다는 설명. 어느 의료기관, 어느 의사에게 물어도 회의적인 답변이 돌아오는 상황에 양산까지 추진하기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얘기들은 의료기기 산업계에서 생소한 말들이 아니다. 오죽하면 혁신적인 의료기기를 개발했지만 아무도 써주지 않아 제품명을 바꾸고 공장을 미국으로 옮겼더니 제품일 팔리더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Made in KOREA' 제품이 'Made in USA'로 바뀌었을 뿐인데 갑자기 제품이 팔린다는 웃픈 이야기다.
이러한 가운데 산업통상자원부는 또 다시 첨단 의료산업 육성을 위해 2천억원대 예산 투입을 발표했다. 하지만 여기뿐만 아니라 정부가 발표하는 그 어떤 육성책에도 판로에 대한 언급은 없다.
시쳇말로 '뭣이 중한지' 아직 모르고 있다는 얘기다. 최근 의료기기 국산화 막바지에 이른 한 기업이 아예 제품을 개발하는 동시에 해외 수출로부터 찾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기업은 인증과 허가 또한 식품의약품안전처 기준이 아닌 유럽 CE 인증에 맞추고 있다.
실제로 이 기업은 아예 내수 시장을 고려조차 하지 않고 있다. 국산 제품을 국내 의료기관이 써줄 것이라는 기대는 이미 접었다는 답변도 돌아온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이 기업에도 수십억원대의 정부 예산이 들어갔다. 역시 국책 과제를 통해서다.
수조원대 대규모 예산을 투입해 겨우 개발한 국산 의료기기들을 국공립 의료기관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최근 유럽 국가들과 수출 계약을 조율하고 있는 기업의 하소연 속에 답은 나와 있다.
"제품의 혁신성은 모두가 인정해요. 하지만 해외에서 수출 계약을 논의할때 100% 나오는 질문이 내수에서의 평가와 리뷰거든요. 결국 리얼월드데이터를 내놔라 이거죠. 하지만 국내에서 판매되질 않았으니 답을 할수가 없잖아요. 제가 반대 입장이라도 그럴꺼 같아요. 제조국에서 외면하는 제품을 어느 나라가 구매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