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입자, 밴딩 설정에 신중…재정소위만 8시간 이상 소요 병원, 협상 결렬에 인상률‧추가 재정 지분 모두 잃어
장장 16시간. 요양기관의 한해 살림살이를 결정하는 수가협상이 마무리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이 중 절반의 시간은 수가 인상에 투입할 재정 결정의 키를 쥔 재정운영위원회 소위원회가 썼다.
건강보험공단은 의원, 병원을 비롯해 한의원, 치과, 약국, 조산원 등 6개 유형과 지난달 31일 오후 4시부터 병협을 시작으로 본격 수가협상에 돌입했다. 수가협상 마지막 날 공급자 단체와 건보공단은 서로 생각하는 수치를 주고받으며 인상률의 격차를 줄여가는 과정을 거친다.
공급자 단체는 밴딩 확대를 요구하고 재정소위는 밴딩 확대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눈길을 끄는 점은 올해 수가 협상 과정에서 재정소위가 어느 때보다도 밴딩 설정에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가입자도, 공급자도 모두 힘들다는 것을 공감하기 때문에 재정소위 위원 사이에서도 의견차가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가입자 입장에서는 수가인상과 보험료 인상을 연결 지어서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재정 확대에서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 이에 따라 재정소위는 수가협상 마지막 날에만 세 차례에 걸쳐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를 할 때마다 정회 시간까지 포함해 약 3시간 가까이 격론을 벌였다.
그 결과 재정소위는 평균 인상률은 2.09%로 하고 1조666억원을 투입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지난해보다도 1250억원 더 늘어난 금액으로 역대 최고 금액이다. 지난해 수가인상을 위해 1조478억원을 투입한 이후 1조원 벽을 두 번째로 넘은 셈이다.
밴딩이 최종 결정된 시점이 새벽 5시. 그제서야 각 공급자 단체도 구체적인 수치로 건보공단 협상단과 0.1% 인상을 위해 밀당을 하기 시작했다.
의원 향한 '훈풍' 예측 가능했나
결과는 의원을 비롯한 약국, 한방 유형의 협상 타결. 치과와 병원은 지난해에 이어 2년째 건보공단이 제시한 인상률 2.2%, 1.4%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렬을 선택했다.
가장 이례적인 것은 수가협상 타결을 처음으로 한 곳이 의원 유형이라는 점이다. 의원 유형을 대표해 협상에 나섰던 대한의사협회는 지난 3년 내내 협상에 실패했고 2%대의 인상률을 받는데 그쳤는데 올해는 협상 타결에다 인상률도 3%를 기록했다.
사실 수가협상 초반부터 의원을 향한 훈훈한 분위기에 대한 예측은 심심찮게 나왔다. 진료비 증가율 등 의료기관의 경영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각종 통계지표가 마이너스를 가리켰다.
더불어 현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던 최대집 집행부가 물러나고 '소통'을 강조한 이필수 회장이 당선되며 의정 관계도 보다 부드러워졌다. 새롭게 당선된 회장이 처음 수가협상에 나선다는 프리미엄도 알게 모르게 작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개원가를 중심으로 한 코로나19 예방접종 사업이 본격화되고 있는 시점이라 정부는 어느 때보다도 의원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수가협상으로 의원과 각을 세우기는 부담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보니 의원 유형을 대표해 수가협상에 나선 대한개원의협의회 수가협상단은 밴딩 확대에 몰두하며 가입자 설득에 집중하며 '국민'에 방점을 찍는 모습을 보였다.
협상 타결 후에도 김동석 수가협상단장(대한개원의협의회장)은 "회원 뜻에 맞는 수가 인상을 하지 못한 부분은 깊이 사과한다"라면서도 "국민의 어려움에 대해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국민과 고통분담을 같이 하려고 한다"고 소감을 전했다.
협상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던 의협 이필수 회장도 "만족할만한 수치는 아니지만 대승적인 차원에서 결렬보다는 타결을 했다"라며 "정부도 의료계의 진정성을 알아줘 추후 어려운 상황에 있는 의료인에게 많은 관심과 배려를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의원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지켜본 한 공급자단체 임원은 "건보공단은 의협 퍼주기에 정신이 없다"라고 지적하며 "환산지수 계약을 제도와 연결 지어서 협상을 한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된다"라고 비판했다.
의원 추가재정 점유율, 병원과 비슷한 수준
정부는 역대 최대로 재정을 투입했지만 '의원' 유형에 인상률을 집중하다 보니 각 단체가 가져가는 추가 재정에도 눈에 띄는 변화가 포착됐다.
병원은 비록 인상률이 가장 낮을지라도 투입 재정의 절반에 가까운 비중을 차지해왔다. 지난해만 해도 9416억원의 투입재정 중 44.7%인 4208억원이 병원 몫이었다. 인상률은 1.6%이었음에도 말이다. 여기에 의원까지 더하면 추가 소요재정의 약 70%는 병의원이 가져갔다. 내년에도 추가 소요재정의 74.4%는 병의원의 몫이다.
다만 올해 수가협상에서 상황이 조금은 달라졌다. 의원이 3%의 인상률을 받으면서 병원과 나눠 갖는 몫이 비슷해진 것이다.
병원이 건보공단의 제시 인상률인 1.4%를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최종 적용받게 되면 총 4014억원의 재정을 갖고 가는데 총 밴딩의 37.6%를 차지한다. 이는 지난해보다 점유율도 7.1%p 줄어든 데다 추가 재정액도 194억 감소한 금액이다.
병원과 달리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협상을 타결한 의원은 지난해보다 998억원이나 더 들고 가게 됐다. 의원 추가 투입 재정은 3923억원으로 병원 보다 불과 91억원 적다. 점유율도 36.8%를 차지하며 병원과 비등하다.
건보공단 수가협상단장을 맡은 이상일 급여상임이사는 수가협상 종료 후 "보험료 인상과 연계된 수가인상을 부담스러워하는 가입자와 적정수가 인상을 통한 코로나19 방역 헌신, 의료이용량 감소에 따른 경영여건 보전을 주장하는 공급자의 기대치가 다른 상황에서 합리적 균형점을 찾기 위해 노력을 다했다"고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