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화된 비대면 방침에 따라 현재 실습을 제외한 의과대학의 강의는 대부분 온라인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모든 강의록과 수업 자료들은 디지털화되어 학생들에게 전달된다. 강의와 자료 열람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좀더 용이한 필기를 위해 대부분 태블릿PC 를 사용한다. 하지만 디지털 학습자료를 읽는 데에는 인쇄된 자료를 읽는 것과는 사뭇 다른 형태의 인지적 노력이 소요된다.
대학에 오기 전까지 인쇄된 교과서와 문제집에 익숙해져 온 세대로서, 나를 비롯한 주위 동기들은 종종 태블릿 화면으로 강의록을 보면서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한다. 수천 장에 달하는 강의록을 하나의 기기에 담는 효율성은 잡았지만, 디지털 자료는 인쇄된 학습자료의 읽기과정과 당연히 다를 것이라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면 여기서 종이자료와 비슷한 집중도, 또는 그 이상의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서울대학교에서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텍스트와 시각자료가 함께 제시되는 디지털 학습자료 읽기 과정 메커니즘은 크게 세 단계로 진행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첫 번째 단계는 초기 정신모형(initial mental model) 형성단계로 텍스트를 읽으면서 전체적인 학습내용의 주제 프레임 워크를 희미하게 설정하며, 두 번째 단계에서는 시각 자료와 텍스트로 초기 정신모형의 세부 내용을 채우게 된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형성한 정신모형을 시각자료와 비교되면서 정확한 정신모형을 형성했는지 확인해 학습내용을 반복적으로 종합하게 된다. 이 때 시각자료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세 번째 단계다. 정확한 내용이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시각자료가 수반되지 않으면, 우리는 내용을 이해했을지라도 이를 머릿속으로 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므로 인쇄된 교과서를 학습하던 때와는 달리 디지털 환경에 적합한 시각자료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이는 모든 분야에 해당하는 내용이지만 특히 의학 분야가 가진 특수성과 높은 장벽 때문에 의학 자료는 학습 환경이 급변하는 속도를 따라잡기 힘들다. 이와 관련해 최근 조명받는 분야로 '메디컬 일러스트레이션'이 있는데, 이를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메디컬 일러스트란 의사나 환자 및 일반인들이 의학과 관련된 정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2D, 3D 형태로 표현된 그림을 말한다. 전문적 지식을 갖고 정확하고 세밀하게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에 미술을 기반으로 하지만 해부학적 지식이 수반되어야 한다.
일러스트는 크게 논문지원용, 강의자료용, 환자용의 세 가지 용도로 활용될 수 있다. 첫 번째는 논문지원용이다. 의학자들이 발표하는 논문에는 이미지가 필수로 들어간다. 예를 들어 기존에 실시하던 수술과 비교해 새로운 수술의 차이를 설명할 때 그림으로 비교해서 보여주면 해당 수술법에 대한 정확도와 이해를 높일 수 있다.
두 번째 강의자료에서의 필요성은 앞 문단에서 이미 언급했으므로 넘어가자. 마지막으로 앞의 두가지와는 달리 비전문가들을 위한 메디컬 일러스트의 수요가 존재한다. 그림 자료는 심리적으로 위축된 환자에게 수술이나 치료 방법을 전달할 때 거부감과 두려움을 줄여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우리는 단순히 어떤 과가 전망이 좋아질지부터, 어느 곳에 소속되어 일하면 좋을지까지 변화하는 사회에 맞추어 본인의 필요성을 찾아야 할 부담을 느낀다. 하지만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는 고민은 건강한 것임을 이야기하고 싶다. 결국 선택은 본인의 몫이지만, 다양한 경험을 통해 그 고민을 함께 하고 실현시키는 사람들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할 것이다. 이것이 메디컬 매버릭스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한다.
도종환 시인의 시 '처음 가는 길'의 한 구절과 함께 글을 마치며 본인의 비전을 찾아 나가는 모든 의대생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