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에는 '의학연구'라는, 다른 의대에는 잘 없는 특별한 블록이 하나 있다. 이 블록은 본과 2학년 마지막 10주 정도를 할애해 아무런 이론 수업을 하지 않고, 실험실 인턴으로 근무하게 하면서 기초의학을 체험하게 하는 과목이다. 평소 연구에 뜻이 있던 학생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고, 연구에 별 관심이 없는 학생이라 하더라도 시험의 압박이 없기에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는 시간이라 모두가 기다려 마지않는 수업이다.
나의 경우 본과 1학년 때부터 관심을 두고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 인턴 활동을 하던 실험실이 있어, 그 실험실에서 전일제로 연구에 참여하며 내가 계획한 간단한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만 1년이 약간 넘는 시간의 인턴 활동 경력만 가지고, 기초의학자의 진로가 이렇느니 의사과학자의 이점과 고충은 저렇느니 하고 논하는 것은 가당찮은 일일 것이다. 그보다 나는 이 글에서, '의대생'으로서 실험실 인턴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왜 실험실 인턴이 의대 생활 중 한 번쯤은 해볼 만한 일인지에 대해 내 일천한 실험실 생활을 근거 삼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우선 의과대학의 기초 실험실은 정작 의사는 없는 '홍철 없는 홍철팀'인 경우가 많다. 이런 가운데 자교 의대 실험실에 인턴을 해보고 싶다고 손을 든 의대생은 그 자체로 천연기념물로, 어딜 가나 환영 받는 존재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의대생은 '라이선스'가 보장된다는 특성상 다른 자연대/공대 출신 사람들에 비해 보다 심리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 '안정성'이라는 무형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강력한데, 감이 잘 오지 않는 사람은 수능을 치기 전 수시를 하나라도 붙어 놓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된다.
정말로 많은 대학원 지망생들이 (이제는 막바지에 다다른) 약대 편입과 대학원 진학을 놓고 고민을 하고, 입학 후에도 마음고생을 많이 한다. 이런 면에서 실험실 생활을 정말 '경험 삼아' 해볼 수 있다는 것은, 의대생 스스로는 잘 자각하지 못하는 큰 특권이다. (물론 이는 역으로 의사 출신 연구자들이 이공계 출신 연구자들에 비해 '덜 절박하게' 만드는 요소일 수 있다. 실제로 내가 만났던 한 인턴 선생님은 이러한 이유로 MD가 아닌 교수님 랩을 선호한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런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왜 (적어도 자기소개서에서만큼은) 붕정만리의 꿈을 안고 입학한 의대생들은 하나 둘 죄다 사라져버리고 다만 몇 명만 남아 실험실에 침전하는 걸까? 아무래도 모두가 꼽는 제일의 이유는 시간의 부족일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의를 듣고 필기를 한 후, 밤에 강의록을 복습하다 잠에 드는 일과 가운데 실험실에 가서 기웃거릴 여유는 없다.
주말, 시험이 끝난 날, 방학 등 의대생이라고 여가시간이 없는 건 아니나 그 잠깐의 소중한 시간마저 연구실 인턴 활동에 쏟으라는 건 정말로 연구에 뜻이 있는 학생이 아닌 다음에야 너무도 가혹하게 들리기 마련이다. 나도 지난 일 년 간 비대면 수업이라는 이점을 살려 학기 중에 실험실에서 하루 종일 있어 봤지만, 하루 7개씩 쏟아지는 수업을 듣고 강의록에 필기를 하다 보면 겨우 실험실 안의 허드렛일을 돕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활동의 전부였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사람은 자기에게 꼭 필요하다 싶으면 어떻게든 시간을 내게 돼 있다. 학생들이 연구에 시간을 낼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은 애초에 자신과 기초의학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임상이라는 확실하고 인기 많은 길을 두고 굳이 기초라는 아무도 가지 않고 돈도 잘 못 버는 길로 방향을 틀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차피 기초의학을 하지 않을 건데 실험실에 들어가 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무어냐. 이것이 내가 주위에서 관찰한 일반적인 의대생의 사고의 흐름이다. 학생들의 기초의학 진로 탐색에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는 편이라는 서울대학교도 이럴진대, 하물며 다른 학교는 어떻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의대생들에게 나는 고(故) 정주영 회장의 유명한 한 마디를 해주고 싶다.
"해보기나 했어?"
사람은 아무리 이론을 공부한다 해도 그 일을 해보기 전까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잘 하는지 모른다. 왜 이미 본과 시절 모든 블록 수업을 다 들어 본 수련의들에게 각 과를 돌게 시키겠는가? 병원의 다양한 환경에서 경험을 쌓으라는 뜻이겠지만 그 안에는 전공을 정하기 전 직접 경험해보고 판단하라는 의미도 분명 내포돼 있을 것이다.
실제로 선배들 얘기를 들어보면 실습을 나가고 인턴을 돌다 보면 이론으로 배우던 것과는 완전히 또다른 별천지가 펼쳐진다고 한다. 기초의학도 마찬가지이다. 유세포 분석을 이론으로 배우는 것과 실제로 내가 세포를 하나하나 분리하고 적절한 형광 항체를 붙여 만든 샘플이 기계를 통과하면서 컴퓨터 화면에 점이 톡톡 찍히기 시작하는 것을 보는 것은 그 감회가 천양지차이다.
내가 세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실험실 사람들과 논의—사실 포닥 선생님의 일방적인 지적인 경우가 많지만—를 해가며 실험 계획을 세우고, 실험을 진행한 결과가 내 예상과 맞아 떨어질 때의 그 '뽕맛'도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심지어 이런 과학적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알아가는 능력은 이미 알려진 정보를 습득하는 능력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기에 의대 성적이 나쁘다고 해도 큰 문제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야말로 해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인데, 기초의학이라는 이름에 지레 겁먹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학생들이 많다는 것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물론 정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실험 결과가 척척 나와서 실험 결과가 척척 나와서 p값이 0.001보다 작다고 그냥 뜨고 그래프마다 별이 3개씩 박히는 ‘희망편’ 가능세계가 있다면, 하는 족족 예상과 달리 결과가 제멋대로 나오고 시간만 날리는 ‘절망편’ 가능세계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나마 임상 연구에서 결과가 안 나오면 환자를 치료했다는 사실이라도 남지, 기초 연구에서 실험이 망하고 나면 남는 것은 싸늘한 쥐의 사체와 실험장비 사용료 청구서(물론 이것은 내가 아니라 교수님이 내시는 것이긴 하다), 그리고 망연히 실험실 책상에 앉아 있는 나 자신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마저도 해보지 않는 것보다는 의대생 때 일찍 해보는 편이 좋다.
이런 경험이 아예 없는 상태에서 막연히 ‘기초의학 연구는 매일 새로운 연구로 가득하겠지!’ 하는 로망을 갖고 전문연구요원으로 지원했다가, 끝없는 파이펫팅 지옥과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실험 결과의 연속에 학을 떼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그 밖에도 랩 인턴으로서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은 많다. 학부생 인턴에게는 교수님의 평가가 훨씬 너그러워지며, 실험 방법 및 배경지식에 대한 무지가 허용되고, 성과가 나오지 않아도 독촉 대신 격려가 돌아온다. 고가의 실험장비를 다뤄볼 기회를 제공받기도 하고, 연구원으로 등록이 되면 작게나마 연구비를 받을 수도 있다.
자, 글을 마무리지으며 나는 약간은 가혹한 말을 하고자 한다. 물리적인 시간도 부족하고, 설령 시간이 난다 하더라도 마음의 여유가 없는 의대생의 심정은 너무도 잘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실험실 하나를 정해 한 번의 방학이라도 시간을 내어 실험실에 다녀볼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설령 최악의 경우 '이건 때려 죽여도 못 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더라도, 일찌감치 자신과 상극인 분야를 하나 걸렀으니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아마 대부분은 그보다는 조금 온건한, '흥미로운 부분도 있지만 지루한 날들도 많다'라는 애매모호한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정말 어쩌면, 자신도 몰랐던 연구 분야의 재능을 찾아낼 수도 있다. 이 경험은 후제 본격적인 의사과학자가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임상 의사로 활동하며 다른 기초의학자들과 소통하는 교두보가 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당신에게 기초의학은 더 이상 '본과 1학년 때 보고 치운 책 속의 과목'이 아닌, '내가 한번 체험해 봤던 의학의 한 분야'가 될 것이다.
자, 지금도 기초의학 교수님들은 언제든 여러분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변해줄 준비가 돼 있다. 여러분은 그냥 재밌어 보이는 실험실을 하나 골라, 교수님께 이메일을 쓰기만 하면 된다. 어떤가? 조금만 용기를 내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