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과 2학년 개강을 앞두고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첫 시간표를 받아들었다. 빽빽한 임상과목 시간표 사이 '환자의사사회'라는 과목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학년이 올라가고 임상과목과 실습 수업 비중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의료행위에는 환자에 대한 이해가 병행되어야 함을 느끼고 있다. 이 때 공감에 대한 교육은 공감능력이 훈련을 통해 강화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이루어진다.
한 연구에 따르면 공감을 잘하는 의사의 환자는 그들의 치료에 더 만족하는 편이고, 의학적 권고 사항을 더 잘 지킬 확률이 높으며, 심지어 무심한 의사의 환자보다 더 빨리 회복하는 경향을 보였다. 심지어 의료진과 환자의 소통은 병원에서만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갈등이 상대와 스스로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비단 병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빚어지는 의료적 갈등 중에는 의료인과 환자 사이 이해 부족으로 빚어지는 것들이 많다.
충분한 소통을 통해 의료진과의 신뢰를 쌓지 못한 국민은 결국 의료 정책에서 의료진이 가지는 입장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그만큼 공감과 이해는 가뜩이나 냉담해져 가는 사회 속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며, 동시에 의료계에서도 매우 중요한 키워드이다.
앞에 나열된 이유들만으로도 의료인들이 공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실천하지 않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의 의료체계가 현재와 같은 방향으로 고착화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의사가 환자에게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고, 정신적인 한계 (번아웃), 그리고 행동적인 한계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수가에 의한 환자 일인당 진료시간 책정 같은 의료체계 문제보다는 예비 의료인 교육 측면에서의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처음 교육을 받는 몇 주 동안 의대생들은 환자의 고통에 누구보다 깊이 공감한다. 그러나 3년째가 되면 공감 수준은 전체 인구 평균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다. 감정 연결을 끊는 것, 즉 환자를 비인간화한 의료인들은 실제로 자기 직업에서 번아웃을 더 적게 경험했다.
하지만 감정적 거리두기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의 번아웃 발생률은 해마다 10%나 증가하였으며 의료과실을 겪은 경우 우울증 위험이 3배 이상 증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감의 경험을 늘리거나 그 필요성을 강조하는 교육은 선천적으로 공감능력이 부족한 학생들을 일시적으로 고양시킬 수 있다. 하지만 졸업 후 의료환경에서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결국 그러한 의사들은 원상태로 되돌아가게 되며 상대적으로 공감능력이 높았던 의사도 감정소모로 인한 번아웃이 올 가능성이 높아진다. 더욱 심각한 것은 번아웃은 공감능력 여하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며 의료인 본인이 스스로 번아웃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번아웃의 심각성을 축소한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의과대학에서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지속 가능한 공감'을 위한 교육이다. 의료인은 환자와 접촉하고 케이스 분석을 통해 공감의 경험을 증가시키는 것과 동시에, 가치관수업이나 정신분석 등을 통해 본인의 감정을 파악하고 감정소모를 예방하기 위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또 현재 가천대에는 학생과 의료인을 위한 정신상담센터가 있는데 많은 이들이 존재를 모르거나, 시간 여유가 없거나, 번아웃을 자각하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이를 활용하지 못한다. 타 기관에서도 의료인을 위한 익명 상담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홍보가 뒷받침된다면, 의료인이 겪는 정신적 피로를 완화하고 좀더 나은 의료체계를 이룰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