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대유행 사태 이후 지속되고 있는 반도체 수급난이 좀처럼 풀리지 않으면서 의료기기 기업들의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서둘러 확보했던 재고도 바닥을 보여가는데다 수급난이 장기화되면서 원가 상승 압박을 버티기 쉽지 않아졌기 때문. 여기에 각종 원자재 가격 상승에 납기일 연장까지 이어지면서 더욱 부담감이 커져가는 모습이다.
12일 의료산업계에 따르면 지속되는 반도체 수급난과 원가 상승으로 의료기기 기업들의 부담이 점점 더 켜져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국내 의료기기 제조 기업인 A사 임원은 "반도체 수급난이 2년 넘게 이어지면서 제조 라인에 상당한 차질을 빚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그나마 지난해 웃돈을 주고 확보했던 재고도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다"고 털어놨다.
그는 이어 "문제는 웃돈을 주고 사려해도 공급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이라며 "반도체 기업들도 당장 전기차 등에 들어가는 고가 반도체 생산라인에 집중하고 있어 쉽게 풀릴 문제는 아닌듯 하다"고 내다봤다.
실제로 코로나 사태 후 국경 봉쇄와 일부 제조 공장 페쇄 등으로 시작된 반도체 수급난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상태다.
그나마 일부 품목은 수급 상황이 개선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는 있지만 여전히 대다수 반도체의 리드타임(주문부터 납기일까지의 시간)은 40주를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주문을 하더라도 이르면 올해 말에나 물건을 받아볼 수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이처럼 반도체 수급난이 지속되면서 가격 또한 연이어 고공상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의 가장 핵심이 되는 MCU(Micro Controller Unit)의 경우 이미 0.7달러에 육박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2020년 0.5달러 수준에 머물렀다는 점을 감안하면 2년만에 1.5배나 올랐다는 뜻이다.
국내 의료기기 기업 B사 임원은 "사실 MCU는 컴퓨터로 말하면 CPU의 개념이라 말 그대로 전기가 통하는 제품이면 무조건 하나씩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며 "결국 MCU가 없는 한 죽었다 깨도 제품이 나올 수 없다는 의미"라고 전했다.
이어 그는 "MCU 가격 인상은 곧바로 원가 상승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셈"이라며 "특히 첨단 의료기기일수록 MCU는 물론 DDI(Display Driver Interface) 등 수십개의 반도체가 들어간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부담은 더욱 더 늘어나게 된다"고 덧붙였다.
더욱 큰 문제는 이같은 원가 상승의 원인이 비단 반도체에 있는 것만도 아니라는 점이다. 의료기기 제조와 유지 보수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원자재들의 가격도 수십배씩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A사 임원은 "반도체도 문제지만 의료기기 제조에 꼭 필요한 알류미늄, 텅스텐, 구리, 나아가 코팅 등에 필요한 금 등의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것이 더욱 큰 부담"이라며 "이렇게 되면 부가가치가 적은 치료재료 등 소모품의 경우 아예 원가가 판매가를 넘어가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고 우려했다.
또한 그는 "더 큰 문제는 급여 항목에 들어가는 제품군의 경우 원가를 반영해 가격을 올릴 수도 없다는 것"이라며 "결국 손해를 감수하고 거래선을 이어갈 것이냐 이쯤에서 손을 놓을 것인가에 기로에 설 수 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이러한 가격 상승도 부담이지만 공급 차질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많다. 반도체와 원자재 수급난이 지속되다보니 의료기기의 리드타임 또한 기약없이 길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반도체 리드타임 증가가 의료기기로 이어지는 도미노가 벌어지고 있는 셈. 이는 곧 자금 회전은 물론 신뢰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자본력이 있는 기업들조차 깊은 고민에 빠지게 하는 원인이다.
글로벌 의료기기 기업인 C사 임원은 "본사에서 계속해서 리드타임 연장에 대한 안내가 내려오고 있다"며 "반도체 수급난이 의료기기 기업에도 분명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일부 신제품 라인의 경우 글로벌 차원에서 현재 리드타임이 20개월 이상 밀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리드타임은 고객과의 신뢰에 결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리스크 관리에 더욱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는 문제"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