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비급여 법정 분쟁'
서울알레르기클리닉 노건웅 원장을 따라다니는 꼬리표다.
그러나 노 원장이 아토피 피부염과 식품 알레르기, 알레르기 면역치료 등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연구자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노 원장은 연세의대 본과 1학년 때부터 기초의학, 특히 면역학에 관심이 많았고, 당시 미생물학교실 이원영 교수를 찾아가 실험에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그 때 스승께서 연구의 기본 전제는 현재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하셨다"면서 "한 순간도 그 말씀을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가 아토피 피부염의 면역기전을 규명하고, 진단 및 치료법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의대 4년간 면역학 연구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 원장은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레지던트 2년차 때인 1998년 유럽면역학회 공식 SCI 학술지인 'Immunology Letter'에 가와사키 병을 모델로 한 면역조절기전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당시 연구 주제가 현재 세계적으로 관심을 갖는 면역조절 관련 세포일 줄은 몰랐다고 한다.
노 원장은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후 삼성제일병원 전임강사로 근무하면서 아토피 피부염 환자에게 인터페론 감마가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환자가 "삼겹살, 자장면만 먹으면 아토피가 생긴다"고 하자 그 때부터 음식과 아토피의 관련성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나갔다.
그는 삼성의료원 교수 전체 컨퍼런스에서 음식알레르기와 아토피 관련 데이터를 정리해 발표했다.
교수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세계적인 아토피 대가들이 하나같이 음식과 관련이 없다고 하는데 전임강사가 뭘 안다고 그런 황당한 주장을 펴느냐는 핀잔이었다.
하지만 노 원장은 연구를 계속했다. 결국 아토피 피부염에 인터페론 감마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치료 가이드라인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제시한 논문을 'Allergy'에 게재했다.
이후 아토피 피부염의 유형에 맞는 치료제, 난치성 아토피 피부염을 유형화해 인터페론 알파에 의해 반응하는 아토피 피부염을 임상적으로 분류하고 진단, 치료하는데 성공했다. 이 논문 역시 2001년 'Cytokine'지에 실렸다.
이 외에도 아토피 피부염에서 식품알레르기가 중요한 원인의 하나라는 것을 규명했고, 세계 처음으로 인터페론 감마를 이용, 집먼지 진드기가 원인이 되는 아토피 피부염을 치료해 'Cytokine'지에 발표했다.
세계가 인정한 연구업적, 한국은 부당청구 낙인
삼성제일병원 알레르기센터장으로 승승장구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센터를 폐쇄하고, 신생아실에서 근무하라는 통보가 날아왔다. 산부인과를 전문으로 하는 제일병원에서 알레르기 분야가 커지는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표면적 이유였다고 한다.
그는 인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사표를 던졌다. 아토피 정복이라는 꿈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미시건대학 교환교수로 1년간 다녀 온 후 그는 압구정에서 서울아토피클리닉을 개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연구를 계속해 아토피 피부염에서 인터페론 감마를 이용, 식품알레르기의 관용유도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뤘다.
관용유도란 특정 음식을 섭취할 경우 아토피 피부염 증상으로 나타나는 식품알레르기를 1주일 정도 치료한 후 같은 음식을 먹어도 증상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치료를 의미한다.
그는 이 연구에서 식품알레르기를 먹어서 치료하는 경구면역치료법을 TIFA(Tolarance induction of food allergy) 또는 SOTI(Specific oral tolerance induction)이라는 용어를 세계에서 처음 사용했다.
이 용어는 현재 식품알레르기를 치료하는 표준치료법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연구한 결과가 세계를 주도하는 치료법으로 인정받아가는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깐.
대한민국은 그를 마치 부도덕한 의사인 것처럼 낙인을 찍었다.
그가 환자 치료에 사용한 인터페론 감마와 검사법이 요양급여기준을 초과했고, 그 비용을 환자에게 부담시켰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2003년 9억원 환수, 업무정지 1년 처분을 받았다. 현지조사를 받게 된 사유도 황당했다. 동네의원에서 아토피만 전문으로 진료하자 복지부가 수상하게 여긴 것이다.
인퍼페론 감마를 사용한 의학적 근거를 제시했지만 통하지 않았고, 그후 7년 동안 행정소송을 벌이고 있다.
진료비가 가압류되면서 집안은 풍비박산 났다. 구정고등학교에 다니던 큰 딸의 급식비조차 대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노 원장은 "개교 이래 급식비를 내지 못한 건 우리 딸 밖에 없었다는 게 담임선생님의 말씀이었다고 한다"면서 "지금이야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땐 정말 너무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우리나라에서는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거나 앞서 가면 절대 안된다는 걸 그 때 알았다"고 꼬집었다.
그는 "외국 학회에서는 연구업적을 인정받아 가고 있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학문적 성과를 발표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했다.
노건웅 원장은 행정처분 이후 몇 년간 그야말로 바닥인생을 살았지만 다시 일어섰다.
노 원장은 2009년 인터페론 감마를 이용해 쇼크성 식품알레르기 치료에 성공한 논문을 'Journal of interferon&cytokine research'에 발표하고, 지난해 식품알레르기를 보다 세분화한 진단과 치료법을 내놓으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노 원장은 이런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영국 Kings college의 저명한 식품영양학자인 Victor Preedy와 함께 아토피 피부염의 식품알레르기를 효과적으로 진단 치료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정립한 서적을 오는 11월 발간할 예정이다.
외국에서는 저명한 아토피 피부염 학자로 통하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설 자리가 없는 현실. 더구나 내일 당장 문을 닫아야 할지 모르는 의원. 그러면서도 1년에 2천만~3천만원이 들어가는 연구에 목숨을 거는 게 노건웅 원장이다.
왜일까?
그는 "우리 큰 딸이 지금 건국대 생명과학부에 다니는데 약속한 게 있다"면서 "비록 지금은 해줄 게 없지만 나중에 의대에 진학하면 아버지 이름을 교과서에서 볼 수 있게 해 주겠다고. 그거 하나보고 산다"며 웃었다.
"사실 내 목에 칼이 들어와 있고, 사는 게 너무 힘들다. 하지만 심한 아토피로 고생하다 찾아온 환자들이 인생의 행복을 찾는 모습을 바라보며, 새벽에 논문 쓰는 게 너무 행복하다. 왜냐면 의학 역사를 한줄씩 써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버티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