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서로 건드리지 않는 암묵적인 진료영역이 있었지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했지만 그런 불문율은 없어진지 오래지요."
의료계가 생존경쟁에 내몰리면서 전문과목간 이전투구가 가열되고 있다.
각 학회들은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학술적 근거를 내밀며 진료영역을 확장하고 있고 이로 인해 고발까지 이어지는 극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고발로 이어진 갈등…양보 없는 평행선
최근 신경정신과개원의사회 회원 70명이 서울아산병원 신경과 김종성 교수를 명예훼손과 진료업무방해 혐의로 고발한 것은 이러한 갈등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갔다는 방증이다.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억제제(SSRI) 처방권을 둘러싼 정신과와 신경과의 갈등이 결국 신경과를 대표하는 교수를 고발하는 것으로 곪아 터졌다는 것이다.
신경과학회 관계자는 18일 "지금와서 굳이 김종성 교수의 발언을 문제삼는 것은 가려진 의도가 있다고 봐야 한다"며 "신경정신의학회가 개원의를 조종해 신경과학회에 전쟁을 선포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못박았다.
실제로 신경정신과개원의사회가 문제 삼고 있는 김종성 교수의 발언 내용은 이미 수개월전 언론 인터뷰를 발췌한 내용이다. 문제를 삼고자 했다면 이미 예전에 건드릴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이 지금와서 이러한 문제를 들고 나온 이유는 뭘까.
보건복지부가 최근 신경과의 지적을 토대로 SSRI에 대한 급여기준을 손질하고 나선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신경과에 이어 내과, 가정의학과 등 각 진료과목들이 처방권 완화에 힘을 보태며 정신과를 압박하자 영역을 지키기 위한 방어벽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과거 정신과와 신경과의 갈등을 들여다보면 이해하기 쉽다.
60일 이상 SSRI계 약물을 처방할 경우 정신과에 의뢰하도록 한 규정을 두고 신경과학회는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왔다.
각 국가의 SSRI 처방 사례를 조사하는 것을 물론, 환자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며 지속적으로 이 규정을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신경정신의학회의 심기가 편했을리 없다. 특히나 최근 복지부가 의사협회에 SSRI 처방권 확대에 대한 의견 조회를 요청하자 이러한 감정은 더욱 극에 달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따라 신경정신의학회는 SSRI 처방권에 대한 TF팀을 구성하고 반격을 시작했다. 최근 의사협회가 마련한 SSRI 간담회에서 나온 처방권 규제안들은 이 TF팀을 통해 나온 것이다.
이러한 갈등이 지속되면서 이제 두 학회는 사실상 대화조차 거부하고 있다. 이를 중재하고자 나선 의사협회도 손을 놓은 상태다. 양보 없는 평행선이 지속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신경정신의학회 관계자는 "SSRI 처방권 문제는 말할 가치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신경과학회 관계자도 "갈때까지 갈 수 밖에 없다"고 맞받았다.
"누구도 예외는 없다"…진료과목별 갈등 최고조
이러한 문제는 비단 신경과와 정신과만의 문제가 아니다. 병원에서, 혹은 의료계에서 이같은 갈등은 굳이 찾아보려 하지 않아도 속속 불거져 나온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갑상선 진료도 마찬가지다. 외과와 이비인후과 중 어느 과가 담당해야 하는지를 놓고 병원에 암투가 벌어지고 있다.
실제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10년 이뤄진 갑상선 수술 4만 1219건 중 외과가 시행한 것은 3만 2505건, 이비인후과는 8071건이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 이비인후과는 2009년부터 외과 수술 수가를 30% 인상하면서 수술 주도권이 넘어갔다고 지적하고 있다.
A대학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는 "레지던트 4년을 포함 평균 6~7년 이상 갑상선을 봐왔던 이비인후과 의사와 외과 의사간 어느 의사가 더 갑상선을 잘 알고 있을지는 비교해볼 가치가 없다"며 "외과의사가 수술을 더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전문가인가에 대한 문제"라고 꼬집었다.
또 다른 이비인후과 교수도 "외과 수가가 인상되면서 보이지 않게 외과로 수술을 몰아주는 경향이 강하다"며 "우리가 이 정도 인데 아마 지방이나 규모가 작은 병원의 경우 얼마나 심한 압박을 받겠냐"고 우려했다.
그러나 외과 의사들의 의견은 이와 다르다. 수가 인상과 관계없이 갑상선 수술은 외과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B대학병원 외과 과장은 "과거 일반외과 시절이라면 이비인후과의 의견도 일리가 있기는 하다"며 "하지만 지금은 외과도 세부전문 시대"라고 운을 띄웠다.
이어 그는 "저 먼 과거부터 돌아봐도 갑상선 수술은 외과의 영역이었다"며 "어거지를 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해답없는 갈등 "결국 의료계가 풀어야"
이러한 갈등이 일고 있는 곳은 이외에도 많다. 종양 치료는 물론, 뇌, 심장 혈관 치료를 둘러싼 내·외과간 갈등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며, 요실금 치료를 놓고 비뇨기과와 산부인과도 혈투를 벌이고 있다.
이로 인해 일부 대학병원들은 다학제 협진 혹은 특성화센터를 표방하며 이를 중재하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이 가운데서도 암투는 여전하다.
한 대학병원 원장은 "사실 이러한 갈등은 누구도 풀기 어려운 난제"라며 "결국 의료계 내에서 해결해야 하지만 저수가에 신음하는 지금 어느 누가 자신의 파이를 내어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