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포괄수가제(이하 DRG) 강행에 맞서 의사협회가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탈퇴라는 초강경 카드를 꺼내들면서, 의료계의 다음 수순이 주목된다.
건정심 탈퇴 감행한 의협 다음 행보는?
노환규 회장이 최근 열린 '경북 의사의 날' 행사에서 건정심 탈퇴 가능성을 시사하자 의료계에서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당장 정부와의 관계가 단절될 뿐더러 건정심 탈퇴로 인해 수가협상, 건강보험 보장성 논의 등에서 소외될 경우 손해가 막심하다는 것이다.
한 시도의사회장은 "당장 건정심 탈퇴보다는 상황을 지켜보자는 의견을 전달했는데, 의협이 다른 판단을 한 것 같다"면서 "전략적인 선택이 필요한 것 아닌가 했다"고 말했다.
의협 집행부 내부에서도 이 같은 의견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의협은 건정심 탈퇴 결정을 내렸고, 실제 강행했다.
이는 의료공급자에게 불리한 현 건정심 구조를 깨지 않는다면 DRG뿐 아니라 어떠한 건강보험 관련 논의에서도 정부에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인식 때문이다.
물론 역대 의협 집행부도 건정심 구조에 문제를 지적하고 국회와 정부에 법 개정을 촉구했지만 건정심 불참이나 퇴장이 아닌 탈퇴로 확전하진 않았다.
변화를 원하는 회원들의 압도적 지지로 출범한 노환규 집행부로서는 과거 수준의 대응으로는 회원들의 열망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현실 인식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송형곤 대변인은 "노 회장에 대한 회원들의 바람은 지금의 현실을 바꿔달라는 것"이라면서 "예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의협, 파업카드 대신 대국민 호소 전략
"파업의 'ㅍ'자도 꺼낸 적이 없다." 노환규 회장이 DRG 저지를 위한 파업 가능성을 예상한 기사에 대한 언급이다.
건정심 탈퇴로 투쟁의 서막을 연 의협이지만 의사 파업 가능성에 대해서는 현재 일축하고 있다.
의료계는 의약분업 파업 이후 중요한 의료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파업'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2004년 DRG 시행때도 그랬고, 의료법 투쟁때도 그랬다.
하지만 노환규 집행부는 다른 접근법(프레임)을 제시하겠다고 강조했다. '의권' 보다 '국민'의 시각에서 바라보겠다는 것이다.
DRG에 있어서도 철저히 국민적 눈높이에 맞추겠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당장 필요한 것은 파업이 아니라 국민에게 DRG의 실상을 알리는 일이 우선이라는 설명이다.
송 대변인은 "환자가 존재해야 의사가 존재한다는 시각에서 접근할 것"이라면서 "DRG가 과연 국민에게 무엇인지 알리는 데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의협이 DRG 반대 기자회견에 맞춰 '대한의사협회장이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편지'라는 이름으로 포괄수가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전면광고를 게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의협의 향후 DRG 대응 방안도 일단 대국민 홍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의협과 16개 시도의사회는 유기적인 협조를 통해 DRG 대국민 홍보전략을 마련 중이며, 인터넷과 SNS를 통해서도 DRG의 실상을 알릴 계획이다.
의협은 적절한 시점이 되면 DRG에 대한 '여론조사'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의협 DRG-건정심 대응 장기전 예고
다만 의협의 이같은 대응이 정부와의 대화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건정심 탈퇴 직전에도 정부와 물밑대화를 계속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의협 관계자들도 공통적으로 "정부와 협상을 중단하겠다는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의협은 지난 23일 복지부에 시급한 의료현안을 논의할 '의정협의체' 구성을 공식 제안하기도 했다. 의협을 포함해 병협, 의학회가 참여하는 기구에서 현안을 논의하자는 것이다.
결국 의협은 대국민 여론의 힘을 빌어 정부의 일방 독주를 막고,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겠다는 포석이다.
이런 점에서 의정 갈등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노환규 회장도 플라자에 올린 글을 통해 "모든 전투에서 빠짐 없이 이기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더 없이 좋겠지만,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몇 개의 전투를 내놓을 수 있다는 생각의 여유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