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달 동안 두세통 문의가 고작입니다. 불경기도 이런 불경기가 없어요."
풍요 속 빈곤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 듯 했다. 서울 곳곳에는 병의원 임대 매물이 넘쳐나고 있지만 찾는 사람의 발길은 한산하기만 했다.
'임대'를 알리는 큼지막한 노란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지만 유심히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병의원 입주시 '파격 할인'이란 문구도 소용없기는 마찬가지. 서울 빌딩의 공실률이 14%에 달하면서 임대 업자들이 병의원 유치에 열을 올리는 현재의 모습이다.
▲"병의원 파격 할인…원장님을 모십니다"
최근 빌딩 전문업체 프라퍼트리가 발표한 서울 지역 연면적 3만 3000㎡(1만평) 이상 빌딩 327동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공실률은 무려 14.1%에 달한다.
이 같은 경기 침체와 빌딩의 공급 과잉에 따라 공실률이 눈에 띄게 증가하자 병의원 유치 전쟁이 불붙었다.
병의원의 특성상 한번 입주하면 오랜 기간 계약하는 데다 임대료 연체 우려도 적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등포구 신길동 우신초등학교에서 사러가시장으로 이어지는 길에서는 심심찮게 임대를 알리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500m 불과한 거리에서 발견된 임대 광고 문구는 총 6개. 그 중 두 곳에서는 병의원 입주시 파격할인이라는 문구를 붙이고 있었다.
한 임대업자는 60평 규모의 임대물을 5천만원의 보증금에 월 3백만원의 임대료로 내놓았지만 두 달째 연락이 없다고 하소연 했다.
그는 "부동산에 내놓은 임대료는 월 3백만원이지만 의원이 들어오기만 하면 파격적으로 조정해 줄 의향이 있다"고 귀띔했다.
다른 지역도 사정은 비슷했다.
내방역과 방배역으로 이어지는 700m의 거리에만 임대 현수막이 5개가 내걸렸다.
이중 병의원을 찾는다는 현수막을 내건 임대업자는 "지난 2월부터 임대물건을 내놓았지만 아직 나가지 않았다"면서 "대로변의 40평 규모를 월 400만원에 싸게 내놨지만 병의원만 들어온다면 원하는 조건으로 최대한 맞춰주겠다"고 강조했다.
지역 부동산중개소 관계자는 "인근 빌딩 주인이 병의원 입주를 위해 4개월간 건물을 공실로 놔둔 경우도 있었다"면서 "하지만 입주한다는 사람이 없어 결국 헤어숍에 임대를 넘겼다"고 전했다.
▲"3개월 무상 임대에 인테리어, 간판 비용까지 지원"
지방과 신도시에서는 문제가 더욱 심각해 진다.
실제로 청주고속버스터미널 부근부터 충북대병원까지 이어지는 길에서 많게는 서너 빌딩 건너 한 곳 꼴로 병의원 임대 현수막을 찾아볼 정도다. 아예 '권리금 없음'을 명시한 곳도 눈에 들어온다.
지역 임대업자는 "사무실은 연간 단위로 계약을 하지만 병의원은 최소 2년 단위로 계약을 한다"면서 "공실률이 높아질수록 건물주의 병의원 선호 경향도 강해진다"고 전했다.
한편 광교 등 신도시에서는 '렌트프리'가 성행하고 있다.
렌트프리란 입주를 조건으로 일정 기간 동안을 임대료를 받지 않는 것. 건물주로서는 무상 임대료를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하기 때문에 손해 볼 게 없는 장사다.
광교 지역 부동산 관계자는 "부동산이 침체기에 접어든 2009년부터 동탄 신도시 등에서 렌트프리가 성행했다"면서 "지금은 신도시 지역 어디든지 관행처럼 굳어지고 있는 실정"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일반 사무실에는 1~2개월 정도 무상 임대 기간을 제공하지만 병의원은 보통 2~3개월 정도, 많게는 6개월까지 임대료를 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귀띔했다.
병의원 부동산 전문 관계자는 "최근 공실률이 높아지면서 건물주들이 간판, 인테리어, 렌트프리 등으로 비보험 진료과 유치 경쟁을 하고 있다"면서 "의원만 입주하면 1층에 약국과 편의점이 자동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파격 할인이라는 말에 현혹돼 임대료를 낮춰 들어가는 것보다는 목 좋은 곳을 선택하는 것이 낫다"면서 "위치 조건이 나쁜 곳일 수록 파격적인 할인 혜택이 많이 붙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