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기기업계를 대표하는 두 단체 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동안 '따로 또 같이' 행보를 보여왔던 한국의료기기공업협동조합(이하 조합)과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이하 협회)의 관계 재설정이 불가피할 정도로 불신의 골이 깊어졌기 때문.
갈등은 '의료기기정책연구원'(이하 정책연구원)이 도화선이 됐다.
앞서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는 지난달 12일 정기이사회에서 정책연구원을 협회 조직개편을 통해 신설한 산업육성본부 산하 '산업진흥실'로 이름을 바꿔 운영해 나가기로 했다.
이는 조합과 협회가 공동으로 운영해 왔던 정책연구원을 기존 독립적인 부속기구에서 협회 정규조직으로 흡수한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소식이 지난달 메디칼타임즈 보도를 통해 처음 전해지면서 조합이 발끈하고 나선 것.
조합보 7월호와 업계에 따르면, 조합은 지난달 27일 한림의료기 오창공장에서 제3차 이사회를 열고 협회 정책연구원 흡수에 대한 이사들의 의견을 물었다.
이 자리에서 이사들은 "(협회 정책연구원 흡수는) 의료기기제조기업을 대표하는 조합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며 "식약처의 인가단체 감싸기와 협회의 독단적인 태도에 대해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특히 협회가 정책연구원 흡수 결정과 조합ㆍ협회 간 MOU 파기에 대한 언론 보도에 대해 납득할만한 설명을 하지 않을 경우 더 이상 공조할 수 없다는 입장도 분명히 했다.
조합이 협회에 발끈하고 나선 것은 얽히고 설킨 정책연구원의 태생적 배경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정책연구원 설립 배경에는 표준통관예정보고(EDIㆍ의료기기 수입요건 확인업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합에 따르면, 1999년 당시 식약청은 수입자 중심의 의료기기단체인 협회를 인가하고 조합의 주요 사업 중 하나였던 표준통관예정보고를 협회에 이관했다.
이에 대해 조합은 수입자단체에서 의료기기 수입요건을 확인하는 것 자체가 모순된다며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표준통관예정보고는 수입되는 의료기기의 금속 함양 기준치를 초과하는지, 인체에 유해한 성분이 있는지, 무자격자에 의한 수입이 진행되고 있는지, 무허가 제품이 유입되는지 여부를 점검하는 것이다.
이를 수입자단체인 협회가 맡을 경우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낸 것.
논란 속에서 식약청과 조합ㆍ협회가 참여한 회의를 통해 조합과 협회에서 나눠 시행하던 표준통관예정보고를 협회에서 통합시행하고 수수료 중 경비를 제외한 이익금을 50%(전체 수수료의 30%)씩 양분키로 했다.
하지만 몇 년 후 협회는 식약청 감사결과를 근거로 업무상 배임에 해당된다며 표준통관예정보고 수수료의 30%를 조합에 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 조합 측 주장이다.
표준통관예정보고 업무 이관과 함께 식약청이 생산ㆍ수출실적 보고기관으로 협회를 지정한 것도 조합과 협회 간 갈등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생산ㆍ수출실적 보고는 업무 특성상 의료기기 생산단가, 수출국의 판매금액 등이 가감 없이 드러나 만약 다국적기업들이 해당 자료를 확보할 경우 국내 의료기기제조업체들의 생산원가, 판매금액, 수출단가 등이 그대로 노출된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시 의료기기제조업체들은 수입사 중심 단체인 협회에 생산ㆍ수출실적 보고를 하면 제대로 보고할 국내 제조사들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이 같은 문제점들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자 결국 식약청이 진화에 나섰다.
조합과 협회가 2009년 10월 21일 MOU를 맺어 이듬해 8월 31일 정책연구원을 설립하고, 조합 이사진을 협회 이사진으로 참여시킨 것.
특히 정책연구원은 당초 조합이 받도록 돼있던 표준통관예정보고 수익금 약 3억원의 재원을 운영자금으로 삼아 국내 의료기기제조업체를 위한 정책연구와 산업육성을 지원한다는 명분 아래 설립됐다.
따라서 조합은 정책연구원 재원이 당초 조합이 받기로 돼있던 표준통관예정보고 수수료 수익금으로 조달된다는 점에서 정책연구원을 조합 산하기관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뿐만 아니라 정책연구원 자체가 협회에서 독자적으로 설립한 기구가 아닌 조합과 협회 간 MOU 체결에 따라 만들어진 상황에서 협회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고 흡수한 것에 대해 크게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것.
이와 관련해 조합은 "이번 사건은 협회가 국내 의료기기제조업체의 대표단체인 조합을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며 "단체 자존심이 걸린 문제인 만큼 협회에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조합 이사진들은 협회가 이 문제에 대해 충분히 공식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한 향후 조합과 협회의 관계 재설정이 불가피하다는데 공감했다.
조합이 과연 협회와의 '관계 재설정'을 위해 현재 협회에 들어가 있는 조합 이사진들의 철수를 통해 조합ㆍ협회 MOU 체결 이전으로 회귀할지 여부에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