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소조항이 없어진 만성질환관리제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 → "개원내과의사회의 만관제 참여를 규탄한다" → "회원들 의견 무시한 회장은 사퇴하라"
최근의 이야기가 아니다.
불과 2년여 전 경만호 집행부가 만성질환관리제(만관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왔던 말들이다.
기묘하게도 노환규 의협 회장이 취임한 후 이와 비슷한 과정을 또 다시 겪고 있다.
독소조항이 없어진 만관제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나 내과개원의사회의 만관제 모형개발 참여 결정, 시도의사회의 노환규 회장 비판, 이를 둘러싼 노 회장의 불신임안 제출까지 의료계는 기막힌 '데자뷰'를 경험하고 있다.
정부 vs 의료계, 회장 vs 회원의 기묘한 싸움
전 의협 경만호 집행부 당시에도 만관제는 첨예한 찬반 대립을 불렀다.
만관제(선택의원제)에 반대 입장을 유지하던 의협은 독소조항이 사라져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이 없다는 입장으로 선회했기 때문이다.
의협이 태도를 바꾸자 시도의사회를 비롯한 각과개원의단체, 전공의협의회, 전국의사총연합까지 가세해 만관제를 수용한 의협 회장과 담당 이사의 자진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의협이 급작스럽게 입장을 바꿔 회원들의 '뒷통수'를 쳤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복지부를 상대로 한 만관제 저지 운동은 경만호 회장의 사퇴론으로 확산됐다.
당시 경만호 집행부의 대항마로 급부상한 인물은 전의총 노환규 대표.
노 대표는 만관제 저지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표심몰이에 나섰고 결국 37대 회장에 올랐다.
잠잠하던 만관제가 태풍의 핵으로 떠오른 것은 올해 6월.
복지부가 토요휴무 가산 시간대 확대안이 건정심을 통과했다는 보도자료에 의협이 적극 만관제 참여를 유도하겠다는 문구를 삽입하면서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노 회장은 토요휴무 가산을 위해 만관제를 수용하기로 했다는 '빅딜설'에 휩싸이자 "만관제와 토요가산 확대는 무관하다"면서 "과거부터 정부가 추진하는 변형된 만성질환관리제를 반대했지, 만관제 자체를 반대한 게 아니다"고 강조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번에도 만관제를 둘러싼 갈등의 양상이 '정부 vs 의료계'가 아니라 '회장 vs 회원'의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시도의사회는 긴급 회동을 갖고 만관제 활성화 방안을 보이콧하고, 의협 회무의 절차적 의결 구조 개선을 촉구하며 노환규 회장을 압박하고 나섰다.
민주의사회는 만관제 저지를 위한 서명 운동 전개와 불신임안 상정을, 의원협회와 시도의사회는 만관제 모형 개발 참여 거부를 선언했다.
반면 노 회장은 "새로운 모형의 개발을 고집하는 것은 의료계가 정책을 주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어차피 격어야할 진통"이라면서 추진 의지를 밝혀 회원들과의 갈등을 예고하고 있다.
의료계의 반대 이유? "회무 집행 방식에 대한 불만"
의료계가 만관제에 거부감을 갖는 표면적인 이유는 이렇다.
만성질환 관리를 통해 제공하는 인센티브가 디스인센티브의 도입의 근거가 될 수 있고 의료질 평가에 따른 성과급 지급 방식 역시 행위량 조절의 기전으로 변형될 수 있다는 것이다.
포괄수가제가 입원과 수술에 대한 재정을 묶는 방식이라면 만관제는 행위량을 조절하기 위한 정부의 사전 포석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의료계 주도로 새로운 제도를 설계한다고 하는데도 반대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뭘까.
모 시도의사회 회장은 "사실상 노 회장의 회무 집행 방식에 대한 불만이 만관제 참여 거부로 표면화됐을 뿐"이라면서 "본질은 회원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 회무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지금도 의료계가 회장을 겨냥해 반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노 회장의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일방통행식 회무에 대한 불만 목소리라는 것.
그는 "만관제 역시 회원들이 원하면 추진하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안하면 그만"이라면서 "시도회장들도 만관제 활성화 수용에 대한 내용을 듣지 못하다가 갑작스레 추진하는 것에 당황했다"고 꼬집었다.
최근 성명서에서 의협의 절차적 의사결정 구조를 준수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 것은 독단적인 의사결정을 중단하고 여론을 수렴해 회무를 추진하라는 뜻이었다는 설명이다.
개원의사회 모 임원은 "노 회장은 항상 회원들에게 이해해 달라고 '설명'을 할 뿐 밑으로부터의 설득을 하지 않는다"면서 "1년 전에는 만관제 참여 거부를 설득하다가 갑자기 만관제에 참여하라고 하면 누가 납득하겠냐"고 지적했다.
실제로 SNS를 통해 모 회원이 "어떤 의사 결정 과정없이 만관제 TF를 만들자고 했냐. 회장님 단독 의견이지 않냐"고 비판하자 노 회장은 "의협은 회원님들로부터 위임을 받은 사람들이 일을 한다"면서 "만관제 시범사업을 제안 여부는 의협이 정부와 협의해 결정할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만관제 수용에 대한 의견 조회가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에 만관제 추진 여부는 의협의 고유 권한임을 강조한 것.
이에 만관제 모형 개발에 참여를 거부한 의원협회 윤용선 회장은 "지금은 만관제의 모형을 개발할 단계가 아니라 과연 만관제가 필요하냐 그렇지 않냐를 논의해야 할 단계"라면서 "민심과 따로 떨어져 의협이 만관제를 급하게 추진하고 있다는 의견이 많다"고 전했다.
만관제로 촉발된 반대 목소리의 근원은 사실상 회원들의 민심이 반영되지 않는 회무에 대한 불만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