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간이 비어버린 대학병원들이 결국 굳게 자물쇠를 닫아 걸면서 교수들이 후원을 받기 위해 제약사를 찾아가는 희귀한 풍경이 나타나고 있다.
이로 인해 일각에서는 대학병원 경영난이 결국 교수들을 불법 관행으로 다시 몰고 가지 않을까 우려하며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예산 따러 앵벌이 나서는 교수들 "생존 위한 선택"
수도권 대학병원의 진료과장을 맡고 있는 A교수는 최근 진료와 연구를 제쳐놓고 제약사를 돌며 후원을 요청하느라 정신이 없다.
10여년을 이어온 심포지엄이 무산될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그가 갑자기 바빠진 것은 최근 병원에서 내려온 예산 절감 방침이 가장 큰 이유다. 세미나와 학술 심포지엄을 지원할 수 없으니 자체적으로 해결하라는 통보가 내려온 것.
지금까지 이 병원은 원내 심포지엄과 세미나에 학술 지원비 명목으로 예산의 절반 이상을 지원해 왔다. 병원에서 지원할테니 제약사에게 손을 벌리지 말라는 배려였다.
하지만 최근 경영수지가 극도로 악화되면서 이같은 배려는 돌연 흘러간 옛 노래가 됐다. A교수가 당황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A교수는 "언제는 당당하게 제약사 후원을 받지 말라고 하더니 갑자기 예산을 지원할 수 없다고 하면 어쩌라는 말이냐"며 "이럴거면 들어오던 후원을 끊지 말았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어 "선배들이 10년을 넘게 이어온 행사인데 나 때문에 대가 끊길까 속이 타들어 간다"면서 "후배 교수들에게도 친한 제약사에 전화해 부스 하나라도 끌어오라고 요구한 상태"라고 털어놨다.
이는 비단 A교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형병원의 B교수도 요즘 하루하루 스트레스가 쌓여가고 있다. 올해부터 연구비 수주 실적이 승진 평가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방침에 B교수는 정부 기관을 뒤졌지만 이미 연구비는 주인이 정해진 상태였다. 결국 임상시험 등 제약사 주도 연구 외에는 끌어올 수 있는 예산이 없다.
B교수는 "연구 실적을 승진평가에 반영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논문이 아니라 연구 예산으로 교원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면서 "돈 많이 끌어온다고 좋은 교수는 아니지 않느냐"고 하소연했다.
그나마 이들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대학병원 진료과장인 C교수는 최근 사비로 50만원씩 의국 운영비를 대고 있다. 병원에서 지원하던 의국 운영비가 1년만에 끊겼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C교수는 자신이 50만원 사비를 내기로 하고 후배 교수들에게 연차에 따라 30만원, 20만원씩 동참을 요구했다. 이 금액은 전공의들 학회 지원비와 회식비 등으로 쓰인다.
C교수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정년 다되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싫고 해서 우선 내 월급을 털기로 했다"고 전했다.
검은 유혹 노출 우려…"대승적 고민 필요
이처럼 마지막 보루였던 병원과 의대에서 마저 돈줄이 막히면서 일각에서는 검은 유혹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당장 목숨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결국 뒤에서 내미는 손을 거부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C대학병원 원로 교수는 "과거 대학병원에서 나타난 리베이트는 모두 개인 착복이라기 보다는 학회 참석과 의국 운영 등의 명목이었다"며 "당장 내 월급을 털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누구라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겠냐"고 귀띔했다.
그는 이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오면 결국 진료과장이나 학회 이사 등이 총대를 메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로 인해 일부 교수들은 정부가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리베이트를 받지 말라고 강요하면서 리베이트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A교수는 "제약사 돈 없이는 학술행사도 개최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고 툭하면 병원과 제약사를 털어가며 리베이트 단속을 하는 것은 너무나 이중적인 태도 아니냐"면서 "그러면서 의료산업을 차세대 먹거리라며 키워야 한다고 말은 잘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그는 "정부도, 병원도, 대학도 돈을 주지 않으면서 의국이 알아서 돌아가고 학회가 저절로 운영되길 바라느냐"면서 "물도 안주고서 열매 기다리는 꼴이다"고 비판했다.
이에 따라 현재 대학병원의 위기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대승적인 차원에서 병원 산업 전반의 성장을 위한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의료의 보장성과 병원 산업 성장을 함께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병원경영연구원 이용균 연구실장은 "정부가 부담해야 할 부분과 병원, 환자의 책임을 명확히 나누는 것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부분"이라며 "역할 분담이 명확해야 책임 소재와 해결 방안을 마련할 수가 있다"고 제언했다.
그는 이어 "병원의 책임을 정부에 돌리거나 정부가 잘못한 부분으로 병원을 옥죄는 방식으로는 결국 공멸을 자초할 뿐"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