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생은 방대한 양의 기초의학, 임상의학 학습을 마치면 흰 가운을 입고 PK (Polyclinic)라는 신분으로 병원에서 실습을 돌게 된다. 병원 마다, 과 마다 실습 과정은 매우 다양하지만 보통 특정 환자를 배정받아 문진과 진찰 등을 시행하고 그 내용을 토대로 발표하는 Case Presentation은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뽑힌다.
학생들이 선호하고, 또 교육 담당 교수 혹은 전공의가 선호하는 경우는 대개 환자의 병력이 복잡하지 않고, 성격이 호의적인 경우이다. 그 외에 질병이 주요 질병인지, 즉 시험에 자주 출제되는 질병인지도 중요한 요인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환자-의사 관계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두꺼운 파일홀더를 들고 다니며 쭈뼛쭈뼛 말을 거는 누가 봐도 어수룩한 실습학생이더라도 병실에 누워있던 환자에게는 예비의사, 즉 준-의사선생님이다. '약 먹으면 좋아질까요?', '지금 많이 심각한가요?' 등의 질문에 대비되어 있어야 한다.
취조하듯이 급하게 문진하고 뭐가 보이는지,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지 열심히 진찰을 다 마치고 이런 질문을 받으면 머릿속이 하얘지기 마련이다. 특히 답해줄 내용이 부정적인 것밖에 없는 경우에는 더욱 난감해진다. 일단은 대충 둘러대고 자리를 허겁지겁 피하지만 향후 실제 의사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좋은 의사일지 의문이 가득하다.
의사국가시험에 실기시험이 추가된 뒤로 모의 환자 진찰(CPX)에 대한 다양한 수험서들이 출판되었다. 책 서두에는 약속한 듯이 모두 환자-의사 관계에 주의하라고 당부의 말을 적어두었으며 환자에게 반말을 한 경우, 환자가 울자 같이 우는 경우 등의 황당한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국시원이 발표한 의사 실기시험 항목에는 나쁜 소식 전하기, 가정 폭력, 금연 상담 등의 환자-의사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한 항목이 꽤 비중을 차지한다.
또 올해부터는 자살, 성폭력 등의 문항도 추가되어 그 비중이 더욱 늘어났다. 수험서에서 위 항목에 대한 단원을 살펴보면 암기(暗記)형 내용 외에 별다른 것이 없다. 특히 '나쁜 소식 전하기'에 관해서는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환자의 5단계 반응과 SPIKES Protocol에 대해서만 나열하고 있다. 내용의 특성상 글로써 설명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점은 어쩔 수 없다만, 그렇다고 글 이외의 방법으로 교육을 받았는지는 기억에 없다.
sympathy, empathy 등의 의사의 덕목에 관한 시험 문제를 풀어본 적은 있지만 그들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언젠가 2시간 정도 외래 참관을 한 적이 있는데, 환자들 중 검사에서 갑상선암 소견을 보인 경우가 꽤 있었다. 나중엔 교수님의 첫 마디에서 이를 알 수 있었다. "본인이시죠?" 라는 질문은 백이면 백 갑상선암이었다. 이 경우 "본인이시죠? 갑상선암입니다. 치료는 앞에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라는 세 문장이면 거의 진료가 끝났다. 근래에 갑상선암 조기 검진에 관한 논란으로 시끄러웠긴 해도 그래도 암은 암인데, 라는 생각에 갸우뚱하고 있으니 환자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어리둥절해하며 진료실을 나갔다.
상황이 다양한 만큼 환자-의사 관계도 다양한 정답이 있겠지만, 상황을 접하면 접할수록 정답과 오답 사이의 경계가 점점 불분명해진다. 스스로도 그 불분명한 영역을 택할까봐 생긴 작은 걱정은 없어지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