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찾아먹는 PK실습을 위한 ‘새내기 PK를 위한 헌내기 PK의 회고록’은 총 5편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본격적인 실습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이번 글에서는 병원생활에 대한 마음가짐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Prologue:병원생활의 애티튜드, 존중과 겸손
실습 종료를 3주 앞둔 지금 문득 생각나는 화두가 있습니다 - 어떤 자세로 실습에 임할 것인가? 본3 분들, 혹시 생각해보셨나요. 저는 새내기 PK 때보다 오히려 지금에서야 더 곱씹고 있습니다. 지난 1년 반의 병원생활은 시험으로 가득한 본1, 2 때와는 확실히 다른 마인드를 요구했습니다.
의과대학의 시험은 '애티튜드'다
강의실에서의 마음가짐을 먼저 되돌아볼까요. 강동성심병원 신경외과의 모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의대의 시험은 애티튜드다.' 좀 더 풀어보겠습니다. 의대 본과의 시험은 험난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 손으로 겨우 쥘 수 있는 분량의 강의록 자료를 외우고, 주 단위로 하루 이틀 밤을 새곤 합니다. 시험 전날이 되면 나만 못 한 건가, 혹시 중요한 야마를 빠뜨린 건 아닌가 무서움도 생기는데 옆자리 친구도 허덕이는 걸 보며 한시름 놓습니다. 때로는 시험 10분전 같은 강의실,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동기들에게 혼자서는 못 구했던 '꿀 정보'를 전수받아 점수를 얻어가기도 하고요. 이렇듯 모두가 함께 고생하고 돕다보니 그럭저럭 살아올라왔습니다.
어쩌면 의과대 시험이 평가하는 것은 의학적 지식 자체보다 극한 상황을 버티고 극복할 줄 아는 애티튜드일지도 모릅니다. 많은 로딩과 부족한 시간, 달리는 체력, 흔들리는 멘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각박한 상황에서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여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를 얼마나 잘 유지하느냐 등등.. 이러한 애티튜드의 총합이 성적에 상당부문 반영되는 것이죠.
강의실에서 '능력'을, 병원에서 '존중'과 '겸손'을 배우다
실습은 좀 다릅니다. 시험으로 스스로의 '능력' 애티튜드를 기른다면, 병원에선 다양한 사람과의 '관계' 애티튜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저는 PK의 가장 중요한 애티튜드로 '겸손'과 '존중'을 꼽습니다. 항상 치열한 경쟁이 붙는 의과대학 환경의 특성상 의대생들이 갖추기 쉽지 않은 자세들인데요. 중요한 원칙 두 가지가 떠올라 적어봅니다.
첫째, 교수님과 선배의사, 병원의 모든 직원들을 존중해드릴 것
각 과의 실습 인계장에는 교수님 특성을 고려한 팁이나 주의점이 적혀있습니다. 예를 들면 A 교수님은 무섭고 깐깐하니 조심해야하고, B 교수님은 착하시고 널럴하니 눈치 봐서 도망가도 괜찮다, C 교수님은 유명하신데 D 교수님은 조용하시고 실력이 뛰어나지 않은 것 같다 등등. 각종 '카더라' 통신을 미리 들은 PK들은 유하거나 실력이 없어 보이는 교수님을 다소 쉽게 생각하거나, 무섭다고 소문난 교수님은 실습이나 회식 때 무조건 기피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옳지 않은 생각입니다. 겉모습이 다양한들, 병원에 '교수' 직함을 가진 모든 분들에겐 환자에 대한 책임감이 누구보다도 대단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특히 부교수나 정교수님들은 학생들의 나이보다 더한 시간을 그 분야의 전문가로 살아오신 분들입니다. 학생 10명이 1시간 토의하는 것보다 교수님 한 분의 한 마디가 더 값어치 있는 지혜임을 종종 보았습니다. 우선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죠. 항상 ‘무얼 배울 수 있을까’에 초점을 두고 교수님을 대한다면 적어도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교수님이라도 진심으로 배우고자 다가가면 친절하게 도움을 주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교수님을 존중해드린 만큼 학생으로 대접 받는 거죠.
이것은 비단 교수님 뿐 아니라 레지던트나 인턴 선생님, 간호사, 기타 모든 병원 근무자분들께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의대생이라는 자부심이 과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이런 분들께 실례되는 언행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러한 '내가 가장 잘 나가'의 태도보다는, 누구에게서나 배울 점을 찾아낼 줄 아는 겸손함과 선배 의학도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는 것이 의학공부에 더 도움이 됩니다.
둘째, 실습 일정에 지나친 호불호를 세우지 말 것, 그리고 최선을 다할 것
어떤 일이 내게 맞는지 알기 위해선 많이 부딪혀 봐야합니다. 눈대중이나 남의 말을 얼핏 들어서는 알기 어렵죠. 스물일곱 개나 되는 분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의대생에게 정말 중요한 원칙으로 생각됩니다. 실습을 돌다보면 PK는 종종 여러 가지 잡일을 맡게 되는데, 여기엔 기본적인 술기(상처 드레싱, NG tube insertion, EKG, 혈당체크, 혈액배양 등등) 뿐 아니라 '학문적인 잡일'도 포함됩니다. 가령 내가 현재 전혀 관심이 없는 과의 논문 발표를 맡는다던가, 매일 아침 간단한 환자 브리핑을 해야 한다던가, 중증질환이나 복잡하고 비정형적인 질병 경과를 보이는 환자를 케이스 발표로 배정받으면 운이 나쁜 것으로 간주됩니다. 환자를 직접 보기보다 KMLE 문제집을 푸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며 환자를 거의 보지 않는 동기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로는 그 과의 학문적 특성에 대해 자세히 알기 어렵습니다. 지금 당장 용도가 적어보이는 일이 주어져도 성실히 해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금의 잡일이 언제어디서 내게 도움을 줄지 모르기 때문이죠. 지금 당장의 식견으로 호불호를 가리기보단 스펀지처럼 최대한 많은 것을 흡수하길 추천 드립니다. 무엇이든 아는 만큼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 정성들여 공부했던 과는 외과계든 내과계든 흥미가 생겼습니다. 환자에 대한 서양의학의 다양하고 체계적인 노력에 감탄했고. 각종 치료법을 개발하고 업데이트하는 선배의사들의 근면함이 느껴져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다짐도 했고요. 또한 나와 잘 맞는 과, 그렇지 않은 과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1년 반 실습을 돈 현재 제 관심은 두 과로 집중되었는데요. 하나는 내과(특히 혈액종양내과)이고 다른 하나는 신경외과입니다. 혈액종양내과는 최신항암제에 대한 논문이 중요시되는 의과학자로서의 면모가 매력적이었습니다. 신경외과는 매우 보수적인 수술법과, 이미 확립된 술기를 정교하고 끈기 있게 해낸다는 점이 제 성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만 두 가지 애티튜드의 중심에 겸손과 존중이 있다는 걸 아실 겁니다. 자신을 낮추고 무엇이든 배우고자 성실히 노력하면 어느새 내 앞에 가야할 길이 나타납니다. 1년 남짓한 병원 견습생 시절이 스스로의 길을 찾는 기회가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다음 호에서는 두 번째 이야기, '병원의 일상 : 실습 전날 준비/병동회진/외래/수술'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