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와 구멍가게의 운영은 다를 수 밖에 없어요. 하물며 대형 제약사와 영세한 제약사의 차이는 오죽하겠어요. 영업사원 수가 수십명에 불과한 작은 제약사 입장에서 제약협회가 요구하는 수준의 CP 따라잡기는 솔직하게 현실적으로 어려워요."
최근 모 국내 제약사 관계자는 이렇게 토로했다.
리베이트 쌍벌제 시행 이후에도 제약업계의 불공정 관행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자 정부는 '리베이트 투아웃제'라는 초강수를 내밀었다. 리베이트 투아웃제 실시를 전후해 상당수 국내제약사들이 기업윤리 전담부서를 구성하고 자율준수 프로그램(Compliance Program. 이하 CP)을 도입하는 등 리베이트 근절을 위한 노력에 나서고 있다.
비록 외부로부터 자극이 큰 요인이 되긴 했어도 업계 스스로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정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앞에 소개한 업계 관계자의 하소연처럼 일부 영세 제약사들은 CP도입과 전담부서의 필요성은 공감하면서도 비용과 인력 등 현실적인 문제로 난색을 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세 제약사가 어려움을 토로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제약협회의 CP 운영 선도가 업계에게는 마치 일관적인 기준에 따른 줄세우기 식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최근 제약협회는 기업윤리헌장 선포식을 갖고 리베이트를 근절하고 공정한 경쟁과 투명한 유통질서 확립, 적극적인 R&D 투자, 의약품 안정적인 생산·공급 등을 실천키로 다짐했다.
제약협회는 선포식에 그치지 않고 회원사들을 대상으로 기업윤리헌장 채택 및 선포 현황 조사에 착수했다. 제약협회가 조사에서 회원사에 요구한 제출항목은 회사명, 작성자(이름, 소속, 직위) 및 연락처, 기업윤리 채택 및 선포 일자(예정 포함), 기업윤리 담당 부서 현황(부서 유무, 부서명, 구성원 및 연락처) 등이다.
상당수 대형 제약사들은 협회의 CP 선도에 앞서 이미 오래전부터 자율준수 관리자 등을 별도로 두고 CP 운영을 실시 중이기 때문에 그닥 어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영세한 제약사에게는 갑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이나 마찬가지다.
한 영세제약사 관계자는 "별도 부서를 구성하지 않았다고 CP에 소홀한 것이 아니다. 선포식 역시 아예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선포식을 하지 않았다고 CP 운영을 하지 않는 것으로 비쳐서는 안 된다. 그런데 협회의 요구 자료는 상위 제약사의 기준에 맞춰져 있는 것 같다. 협회의 기준에 맞추는 제약사와 그렇지 못한 제약사가 공개될 경우 결과적으로 줄세우기가 될 것이고 이에 따라 영세제약사들은 후폭풍을 맞게 될 것"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제약협회의 지나친 의욕에서 비롯됐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실제로 그간 협회의 행보를 보면 업계의 차이를 감안한 가이드라인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부족해 보인다. 마치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이 학생들의 수준은 감안하지 않고 모든 학생을 서울대에 진학시키기 위해 수업을 밀어 부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협회는 이달 중으로 회원사들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개최할 계획이라고 한다. CP 운영과 관련한 회원사들을 애로사항을 직접 듣겠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회원사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것은 박수를 받을만 하다.
한가지 우려되는 점이 있다.
이번 워크숍에서 협회는 CP 운영이 어려운 회원사들에게 노하우도 전수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 협회의 CP 자료 제출 요구에 응답한 회원사는 40여개사에 불과한 상황에서 각 제약사의 처지에 맞는 샘플을 얼마나 확보했을지 의문이다. 노하우 전수라는 것이 대형 제약사의 '훌륭한 샘플'의 전달에 그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제약협회가 업계를, 회원사를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이번 워크숍에서 형식적 구호 외치기가 아닌 제약사들의 수준과 처지에 맞는 CP 가이드라인 도출에 힘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