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이 늦게 나와 공연히 애를 태웠다. 유럽 전역에서는 하루 천만개의 가방이 주인과 함께 여행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세상에나. 생각해보니 짐이 나와 함께 집에 도착하지 못한 경우는 모두 유럽을 다녀올 때였던 것 같다.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에 정통한 가이드 주영은 씨가 안내를 맡는다고 했다. 바르셀로나는 길이가 10Km 내외로 작은 도시이고, 공항에서 시내까지도 가깝다고는 하지만 도로망이 열악하고 대중교통이 발달되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한다. 그전까지는 가끔 비가 내리면서 기온이 떨어져 가을 분위기가 나기 시작했다는데, 우리가 도착할 무렵부터는 낮 기온이 갑자기 30도 가까이 오르고 있다고 한다. 미국 같으면 인디언 썸머라고 했을 터인데 스페인에서는 무어라하는지 모르겠다.
스페인 도착 첫날 일정은 람블라스가를 걷고, 가우디의 작품이라는 성가족성당과 구엘공원을 구경하는 것이 전부다. 바르셀로나에는 미술관만 해도 국립 카탈루냐 미술관,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 그리고 바르셀로나 호안 미로 재단이 있고, 모데르니스모 루트도 있어 구경할 것이 많다. 그런데 네 시 경에 도착한 바르셀로나를 해지기 전까지 구경하고 내일은 몬세라토로 떠나야 한다니 아쉬울 수밖에 없다.
모데르니스모 루트는 19세기 산업화가 이루어질 무렵, 바르셀로나에서만 나타난 문화의 회귀현상의 영향을 받은 건축물을 볼 수 있도록 연결한 관광프로그램이다. 모데르니스모는 기계를 이용해서 똑같은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에 반발하여 수공예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었는데, 건축, 회화, 조각, 수공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작품에 반영하는 경향이 있었다. 가우디는 모데르니스모 움직임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다.
성가족 성당으로 가는 길에 람블라스거리를 구경했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라는 람블라스는 관광객이 넘쳐 걷기도 힘들었다. 스페인 건축을 공부한 김희곤 교수는 "람블라스 거리를 걸어보지 못한 사람은 바르셀로나의 낭만을 느끼지 못한 사람이며, 세상 끝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했다. 도시의 모퉁이에서 정신적 위기를 드러내며 살아가는 영혼들이 다른 영혼들과 걸으며 고뇌를 청소하는 곳이 바로 길과 광장이라면, 람블라스 거리가 바로 그런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날 거리를 메우고 있는 인파들은 나처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는 모양새로 보아 대부분 관광객들 같았다.
람블라스 거리를 따라 내려가면서 가우디가 건축사 자격을 따던 해에 제작했다는 가로등을 찾아봤지만 책을 제대로 암송하지 못한 탓에 찾지 못했다. 다시 확인해보니 그 가로등은 레이알광장에 서 있다고 했다. 하지만 람블라스 거리에 서 있는 가로등은 가우디의 가로등로 참 닮았다. 바르셀로나는 오래 전에 만들어진 도시인데 마차를 고려해서 만든 시가지라서 거리가 좁고 주차장공간이 아예 없기 때문에 버스가 승객을 내려주고는 약속한 시간에 다시 태우러 올 때까지 거리를 헤맨다고 한다. 그동안 태워 없애는 가솔린의 양도 엄청날 것이다.
일행 가운데 한 분이 약속한 시간이 10분이나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아서 주영은 가이드와 이봄 인솔자의 애를 태웠다. 단순히 사람을 기다리는 문제가 아니라 성가족성당에 입장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단체여행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이드와 약속한 시간을 지키는 것이다.
다행히 시간을 맞춰 성가족 대성당(La Sagrada Familia)에 도착했다. 현지가이드의 도움으로 입장을 준비하면서 주영은 가이드의 완벽한 설명이 시작됐다. 성가족 대성당은 보통 수난의 파사드가 있는 서문으로 입장을 한다고 들었는데, 우리는 가우디가 생전에 지은 탄생의 파사드를 통하여 입장을 했다.
여전히 공사가 진행 중인 성가족 대성당은 1882년 건축가 비야르가 맡아 시공을 했지만 발주처인 성 요셉 영성회와의 마찰 때문에 지하제실도 마무리하지 못하고 중단됐다. 결국 성가족 대성당 건설공사는 1883년 11월 약관 31세의 가우디에게 맡겨지게 됐다.
성요셉 영성회 회원들 앞에서 성당건축에 관한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는 자리에 나타난 가우디는 고작해야 버섯 모양의 탑들이 하늘을 향하여 삐죽삐죽 솟아 있는, 투박한 스케치 한 장을 내놓은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하지만 "성당의 평면과 구조를 설명하는 그는 마치 31살 예수가 복음을 전하듯이 구체적인 확신에 차 있었다"라고 김희곤교수는 전한다.
그런데 성가족 대성당은 모금을 통해 건축비를 마련하고 있어 진척이 지지부진했다. 1909년이 돼서야 재개된 공사 역시 재정상황이 불안정해서 발목을 잡았고, 1910년 파리순수예술협회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가우디는 류머티스와 통증, 고열, 발진에 더해 브루셀라병으로 무너져 사경을 헤매기도 했는데,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1918년부터는 건축현장을 지키면서 오로지 성가족 대성당의 건축에만 몰입하기 시작했다. 1926년 6월 7일 오후 친구를 만나러 외출한 가우디가 전차에 치어 죽음을 맞을 때까지.
남루한 작업복에 피투성인 채로 쓰러진 가우디는 우여곡절 끝에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행려병자로 오인돼 적극적인 치료를 받지 못하고 결국은 사흘 뒤에 죽음을 맞고 말았다고 한다. 생전에 가우디를 괴롭히던 성당건축비용문제는 이곳을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내는 입장료 수입만으로도 해결하고도 남아, 오히려 입장객을 제한하고 있다. 나도 아내와 함께 각각 2만5000원 정도의 입장료를 냈으니 성가족대성당의 건립에 일조한 셈이다.
성가족 대성당을 살펴보면, 마요르카 거리에 면한 남쪽 정면에는 다섯 개의 복도와 연결되는 다섯 개의 입구를 내고, 동서측면의 입구에도 다섯 개의 복도와 연결되는 세 개의 입구가 있다. 타원형의 북쪽 제단 외벽은 지하제실의 외별과 이어지므로 입구가 없다.
동,서,남의 정문에는 각각 4개의 탑을 설치하여 12사도를 나타냈고, 십자가의 교차점인 건물의 중앙 돔 주위에도 역시 네 명의 복음기록인을 나타내는 4개의 탑이 세워지고 있다. 북쪽 후원 부분에는 중간 높이로 제단 상부에 성모 마리아께 바치는 탑이 들어서고 중앙돔의 상부 정상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쳐질 17미터 높이의 십자가와 천창이 들어선다.
동문에 있는 탄생의 파사드는 예수 탄생, 유년기, 청년기를 상징하는 조각들로 장식돼 있다. 가브리엘 대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오는 수태고지 장면, 마구간에서 탄생하는 예수의 모습, 동방박사와 목동의 경배 장면 등이 섬세하게 조각돼 있다. 탄생의 파사드는 가우디 생전에 공사가 진행돼 가장 가우디답다. 오랜 세월의 흐름이 새겨진 듯 거무스름하게 퇴색한 화강암의 색조가 오히려 정겹게 느껴진다.
대성당에 들어서면 내부에 우뚝 세워진 기둥들은 위쪽으로 가지들을 내뻗치고 있어, 마치 울창한 숲속에 서있는 나무를 연상케 한다. 숲에서 나무가 내는 피톤치드가 치유의 효과를 나타내듯 성당에 들어서면 정신이 절로 맑아질 것만 같다.
대성당의 내부공간은 영광의 파사드로부터 수난의 파사드로 이어지는 벽에 설치된 수많은 창과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자연조명을 최대한 이용해 밝히고 있다. 제단 앞에 걸린 화려한 천개 아래로 예수상이 매달려 있는데, 천개의 위에는 밀이 자라고 아래로는 포도넝쿨이 걸려 있다. 예수의 살과 피를 의미하는 빵과 포도주를 상징한다.
서쪽에 있는 수난의 파사드는 탄생의 파사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예수와 성모, 천사, 12사제를 싣고 하늘로 떠나는 거대한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하는 수난의 파사드 벽면의 조각은 가우디 사후에 조각가 수비라치가 조성하고 있는데,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을 현대적 조각으로 빚어냈다는 것이다.
가우디 본인 역시 생전에 성당을 완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듯 "내가 성당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 않다. 난 늙을 테지만 내 뒤를 다른 사람들이 이어갈 것이다. 작품의 정신은 항상 지켜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작품과 함께 살아가는 세대의 것이다"라는 말 그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