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에 이르는 여정이 길었던 탓인지 알람이 울릴 때까지 죽은 듯이 잤다. 어제 밤에는 달이 휘영청 밝았는데, 하늘이 흐리다. 스페인에서는 흐리면 비가 온다고 해서 우산을 챙겨 넣었다. 여행 둘째 날 우리는 바르셀로나에서 북서쪽으로 50킬로 정도 떨어진 몬세라트(Montserrat)로 간다.
몬세라트로 가는 길에 차창 너머로 보이는 야트막한 구릉에는 잘 정리된 밭이 펼쳐진다. 철이 지난 탓에 무엇을 주로 경작하는지는 모르겠다. 몬세라트에 도착할 무렵에는 하늘을 두텁게 덮고 있던 구름이 어느 새 걷히고 시리도록 파란 하늘에 몇 점 구름만 남아있었다.
해발 725m의 몬세라트는 카탈루냐어로 '톱니모양의 산'이라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몬세라트를 언뜻 보면 기둥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다. 오랜 옛날 깊은 바다였다가 융기된 이곳의 지형은 퇴적암으로 이뤄져 있어서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작은 자갈들이 섞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흘러든 흙의 종류에 따라서 퇴적암의 강도에 차이가 있고,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약한 부분이 깎여 나가면서 기묘한 형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주차장에서 바라 본 산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이리 보면 비스듬히 누운 곰 한마리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치는 듯하고, 저리 보면 이 곰이 하늘을 품으려 드는 것 같기도 하다. 여행작가 박정은씨는 이곳에서 원숭이 모습의 바위를 봤다고 적은 걸 보면,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양한 동물을 그려낼 것 같다.
몬세라트의 기묘한 산봉우리들을 올려다 보면 전날 구경한 성가족성당의 옥수수처럼 생긴 첨탑이 떠오른다. 가우디는 몬세라트의 육감적인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성가족 대성당의 첨탑을 구상했고, 몬세라트의 암벽으로부터 카사밀라의 외벽과 지붕을 설계했다고 한다. "하늘 아래 독창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새로운 발견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던 가우디의 말은 몬세라트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한다.
몬세라트의 기묘한 모습은 영적인 기운이 서린 땅으로 믿기에 충분했을 것 같다. 그래서 카탈루냐 민중의 성지가 된 몬세라트에 수도원을 세우게 됐는데, 1025년 올리바 주교가 적운 규모의 베네딕토 수도원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규모가 커져 15세기 무렵 대수도원이 됐고, 1592년에는 몬세라트성당을 세우게 됐다는 것이다. 1811년 이곳을 침략한 나폴레옹군은 수도원 전체를 철저하게 파괴했던 것을 1852년부터 다시 짓기 시작하여 1901년에 이르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고 한다.
몬세라트 중턱에 있는 수도원으로 오르는 방법은 네 가지가 있다. 걸어가기, 버스타기, 산악열차 타기, 그리고 케이블카 타기다. 우리는 30유로를 내고, 산악열차를 타고 올랐다가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기로 했는데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산악열차에 올라타면서 어느 쪽에서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는지 몰라 눈치를 보다가 결국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서서 가게 됐다. 정답은 진행방향의 왼쪽에 앉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쪽으로 가는지 출발을 해봐야 안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떻든, 가파른 탓에 느리게 움직이는 산악열차의 창밖으로 펼쳐지는 변화무쌍한 풍경은 가슴이 저릴 정도였다. 수도원에 가까워지면서 멀리 첩첩히 겹쳐있는 산들이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가, 구비를 돌아가면 널따란 평원이 한없이 펼쳐진다.
이곳은 1881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카탈루냐의 수호성인으로 지정된 검은 성모상(라 모레네타, La Moreneta)이 유명하다. 전설에 따르면 성모의 성화를 제일 처음 그린 성 루가가 만들었다는 검은 성모상은 기원 후 50년에 스페인으로 들여왔다고 한다. 711년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무어인들이 파괴하지 못하도록 몬세라트 동굴에 숨겨졌다가 880년에 양치기들에 의하여 다시 발견됐고, 이곳에 예배당을 세워 검은 성모상을 모시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학자들에 의하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보이는 검은 성모상은 12세기 말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대략 500여개에 이르는 검은 성모상이 유럽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모두 11~13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진실이 무엇이건 검은 성모가 오른손에 들고 있는 황금구슬을 만지면서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 전해진다.
수도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음각으로 표현된 독특한 모습의 조각이 우리 일행을 반겨준다. 간결하면서도 인체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조각상의 모습은 어제 본 성가족 대성당의 수난의 파사드를 장식하는 조각작품들을 연상케 한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 서 있는 예수와 열두 제자의 조각상이 올려 보이는 곳에 원이 표시돼 있다. 이봄 인솔자는 바로 몬세라트의 영기가 모이는 곳이라고 강조하고 좋은 기운을 많이 받아가기를 권유했다. 이곳에서 1시간 정도의 자유시간을 얻었다.
몬세라트에서는 성당은 물론 검은 성모상이 처음 발견됐다는 '성스러운 동굴'이라는 뜻을 가진 산타 코바(Santa Cova)에 있는 예배당도 볼만하다고 하는데, 자유시간의 대부분을 써야 할지도 모르는 검은 성모를 알현하기로 하였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오른편에 있는 회랑을 따라 검은 성모를 알현하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검은 성모를 알현하기 위한 입장시간을 10시 20분으로 제한한다는 풍문이 돌았던 탓에 회랑 중간에 있는 문이 가까워지면 눈앞에서 문이 닫히는 상상을 하면서 공연히 마음이 초조해졌다.
처음에는 새치기하는 동양인들을 눈감아주곤 했는데, 결국은 정색을 하고서 따지고 말았다. '줄을 제대로 서라. 당신이 내 앞에 서 있었던 적이 있었느냐'라고. 새치기를 하면 결국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인데,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빈 소원이 제대로 이뤄지기를 바라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없었을까? 마음을 곱게 써야 복도 받는 것이다. 새치기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탓에 회랑을 따라 모셔둔 성자들의 모습이나 성당 내부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먼저 간 사람들이 절절하게 소원을 빌고 있는지 줄은 마디게 줄어들었다. 그래서인지 기다리다가 지쳐 떠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성당 입구에서 중앙제단 뒤쪽에 있는 검은 성모를 만나기까지 4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조바심을 눌러가며 기다린 보람이 있어 검은 성모를 알현하게 됐다.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미리 준비한 소원을 짧게 빌었다. 당연히 내가 빌었던 나름대로의 특별한 소원은 이뤄질 때까지 내 마음 속에 봉인을 할 참이다. 물론 소원이 이루어지면 세상에 알리도록 하겠다.
성당에 나가지 않는 아내가 검은 성모를 알현하겠다고 해서 처음에는 검은 성모에게 비는 소원을 들어주는 특별한 힘을 기대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중에 들으니 소원을 비는 것은 둘째고, 검은 성모 앞으로 이어지는 기다란 줄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여행을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여행선배인 아내로부터 한 수를 배운 셈이다.
투명한 아크릴 속에 앉아 있는 검은 성모는 얼굴과 몸의 비례가 별다르다는 느낌이다. 성모의 오른손에 지구를 의미하는 황금구슬을 올려놓고 있는데, 이 부분의 아크릴이 동그랗게 파여 있어 손으로 만질 수 있다. 성모의 무릎에 앉아 있는 아기예수의 왼손에는 들고 있는 솔방울은 생명과 다산을 상징한다.
성당에서는 매일 오후 1시에 한 차례 미사를 봉헌한다는데, 토요일을 제외한 미사시간에는 14세기에 창단되어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에스콜라니아(Escolania) 소년합창단의 성가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11시에 모여서 케이블카를 타기로 한 우리 일행에게는 그림의 떡인 셈이다. 저녁에 발렌시아에 도착한 시간을 두고 보면, 일정을 조정해서 미사에 참여할 수도 있었을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시간이 조금 남아 이봄 인솔자가 알려준 '천국의 계단'이라는 포토존을 찾아다녔는데 아는 사람이 없다. 알고 보니 '천국의 계단'이 아니라 '12사도의 계단'이라고 한다. 이곳을 다녀오다가 아내와 길이 엇갈리는 바람에 서로 찾아 헤매는 작은 해프닝도 있었다. 언제나 같이 붙어 다녀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