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6일째, 이날은 지중해를, 아니 대서양을 건너 모로코로 건너갔다. 가는 길에 하얀 마을(Pueblo Blanco)로 유명해진 미하스에 들렀다. 밤새 요란한 바람소리로 귀곡산장이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게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하더니 결국은 빗속에서 출발했다.
이날 아침 나는 대형 사고를 칠 뻔했다. 스마트폰을 방에 두고 나온 것이다. 이날따라 버스를 운전하는 발따싸르 아저씨에게 포루투갈어로 "봉 디아(Bom dia)"하고 아침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메모해둔 인사말을 확인하려고 스마트폰을 찾았지만 어느 주머니에도 들어있지 않았다. 당연히 숙소에 가봐야 했다. 프런트에서 열쇠를 다시 받아 방에 가보니 텔레비전 옆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아침에 짐을 싸면서 던져놓았던 모양이다. 호텔방에서는 모든 물건을 눈이 닿는 곳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새기는 기회가 됐다.
자료를 정리하다 보니 프랑스에서는 1월 6일을 주현절이라는 종교축제일이 있다고 한다.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 베들레헴으로 찾아와 경배를 드린 세 명의 동방박사-멜키오르(Melchior), 가스파르(Gaspard), 발타쟈르(Baltazar)-를 기억하는 날이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에게 황금, 유향, 몰약을 바쳤다고 전해오는 것처럼 아이들은 동방박사가 선물을 주는 것으로 믿는다고 한다. 주현절 축제는 스페인에서도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탄 버스를 운전하는 발따사르 아저씨는 내게 동방박사였다.
간간이 비가 뿌리는 가운데 버스는 바르셀로나에서 오는 지중해 고속도로를 타고 미하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지중해가 펼쳐지고 있지만, 두껍게 드리워진 구름 때문에 눈이 시리도록 파랗다는 지중해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이곳은 코스타 델 솔, 태양의 해변이라는 말처럼 유럽인들의 휴양지가 되었고, 스페인 부의 원천이 되었다고 한다. 최근 스페인의 경제가 흔들리게 된 것도 미국발 경제위기가 유럽으로 확산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즉 스페인의 휴양지에 별장을 가지고 있던 유럽인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스페인의 별장을 처분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스페인의 부동산거품이 꺼진 영향이 컸다는 것이다.
미하스 마을에서 가까운 말라가는 피카소의 고향이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피카소에게 "네가 군인이 되고 싶으면 장군이 되고, 성직자가 되고 싶으면 추기경이 되거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뒷날 피카소는 "나는 화가 되고 싶었고 그리고 피카소가 됐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가보지 못한 말라가에 대한 아쉬움을 피카소의 일화로 대신한다.
미하스 마을은 어제 구경한 론다에서 100km 떨어진 해발 400m 내외의 미하스 언덕에 있다. 미하스 마을은 고대 로마시대에 뿌리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유서가 깊은 마을이라고 하는데, 마을 앞으로 지중해가 펼쳐지고 날씨가 좋으면 아프리카 대륙까지도 볼 수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지방은 햇볕이 뜨거운 탓에 하얀 집을 많이 지어왔다고 한다. 박정은 작가의 에서는 카디스(Cadiz)주에 있는 하얀 마을들을 함께 묶어서 돌아보는 '하얀 마을 루트'를 소개하기도 한다. 숱한 하얀 마을 가운데 미하스 마을이 손꼽히게 된 것은 언덕을 배경으로 하얀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인상적인 모습이 몇몇 일본인들의 눈길을 끌고, 이들을 통해서 입소문이 나는 바람에 일본사람들이 잘 찾는 관광지로 부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관광지로 주목을 받으면서 마을사람들은 흰 벽을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새로 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멀리서 보면 하얗게 빛나는 미하스도 가까이에서 보면 벽은 하얗지만 지붕은 적갈색이다. 가까이에서 보면 우리네 기와와 같은 것을 올렸는데, 기와올린 솜씨를 보면 마감이 거칠기 이를 데가 없다. 역시 손솜씨는 우리네만 못한 것 같다. 그래도 멀리서 보면 멋있어 보인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도로를 타고 산중턱에 올라앉은 미하스 마을에 도착할 무렵, 거짓말처럼 비가 멎는다. '바위 성모 광장(Plaza Virgen de la Pena)' 바로 옆에 있는 관광안내센터에서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각종 기호를 조합해서 만든 세계지도에서 한반도에 해당하는 곳에는 '東'이라는 한자어가 새겨져 있었다. 이곳이 '일본해'가 아닌 '동해'라는 사실을 스페인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지도를 소문내면 일본정부가 '日'자로 바꾸라고 미하스마을에 압력을 넣을 것 같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바위성모광장 전망대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는 시리도록 푸른 지중해가 손에 잡힐 듯 펼쳐지고, '코스타 델 솔(태양의 해안)'과 '푸엔히롤라'라는 해안가 마을을 굽어볼 수 있다고 했는데, 이날은 날씨가 부조를 해주지 않아 구름이 낮게 드리운 지중해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전망대의 끝에는 '바위 성모 은둔지(Ermita de la Virgen de la Pena)'라고 하는 성당이 있다. 성당이 있는 곳에 있던 성벽에 수백 년이 넘도록 숨겨져 있던 성모 마리아상을 16세기 들어 발견하고, 성모마리아상을 모시기 위하여 성당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고 한다. 혹은 이곳을 산책하던 이가 종탑에 앉아있던 비둘기가 성모 마리아로 변신하는 것을 보고 성당을 건설하게 됐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에르미타'라는 단어는 '은둔지', '사람이 살지 않는 장소', '세상과 뚝 떨어진 집', '사막과 같이 황량함'이라는 외롭고 쓸쓸한 인상의 의미를 간직한 곳, 종교 세력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신자들이나 세상을 등지고자 했던 사람들 혹은 여행자들이 바람과 추위를 피해 잠시 머물며 다음 여정을 마음에 새기던 곳을 일컫는다고 한다.
오랫동안 피레네산맥을 따라 흩어져 있는 에르미타를 찾는 작업을 해온 벨기에 사진작가 세바스티안 슈티제와 합류했던 지은경은 에서 '나는 곧 에르미타를 지었던 수도자들을 막대한 야심을 품었던 자들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오히려 스페인의 에르미타와 우리 산하에 흩어져 있는 암자의 이미지가 겹치는 느낌이 들었다. 수행정진하기 위하여 속세와의 인연을 끊기에 에르미타와 암자는 좋은 수행처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미하스마을에서 만난 에르미타는 오히려 속세와의 인연이 강하게 남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냐고? 여기 모신 성모의 모습이 바비인형을 흡사하게 닮았기 때문이다.
탕헤르가 가는 연락선을 타기 위하여 따리파에 가는 길에 일찍 들른 것이라서 미하스마을은 아직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우리처럼 일정에 쫓기는 여행자들만이 텅 빈 골목길을 기웃거리다가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관광센터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산 세바스티안거리는 미하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고 하지만, 잠들어 있는 거리에서는 제대로 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관광객들 외에 이곳 사는 사람도 구경하지 못했고, 이곳의 명물이라는 당나귀택시 역시 그림자도 구경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미하스와 작별을 고해야 했다.
이제 우리는 '모르고는 가도, 알고는 못 간다'는 모로코로 건너가기 위해서 따리파(Tarifa)로 이동한다. 미하스를 돌아다닐 때는 잠잠했던 빗줄기가 버스를 타자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알카사바에서 보여준 조형진 가이드의 순발력에 하늘도 질렸나 보다. 버스를 타는 동안 비가 내리는 경우는 많았지만, 구경할 때는 더 이상 비를 맞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부딪힌 문제는 비가 아니라 바람이었다. 조형진 가이드가 전날 확인한 기상상황은 강풍이 예고되어 배가 출항하지 못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다른 항구로 이동해서 큰 배를 타야 한다는 것이다. 일정에 큰 차질을 빚는 상황이 될 수도 있어 모두 간곡하게 기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오전에는 '따리파지역 맑음'이라는 낭보가 전해진 것을 보면 스페인 기상대 역시 슈퍼컴퓨터로 디아블로 게임이라도 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