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매출 1000억원이 채 안 되는 국내 중소제약사에 다니는 L부장. 첫 만남에서 기자의 명함을 받은 L부장은 자신의 명함을 건네기 전에 잠시 주저했다.
"실은 제가 명함이 두가지라 기자님께는 어떤 명함을 드려야 할 지 모르겠네요."
"그냥 두 개 다 주시면 안 될까요?"
기자의 주문에 L부장은 그제서야 두 장의 명함을 내밀었다. 하나는 '약가' 담당 명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CP' 담당 명함이었다.
제약사에 있어 약가와 CP는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업무가 없다.
"많은 일을 하시네요. 바쁘시겠어요."
"뭐, 그렇죠." 대답하는 L부장의 눈을 자세히 보니 실핏줄이 터져 있었다.
L부장이 두 종류의 명함을 가지고 다니게 된 것은 제약업계가 CP 강화에 나서면서부터다.
L부장의 주업무는 약가 및 급여기준과 관련한 대관 업무였다. 그러던 중 지난해 7월 베이트 투아웃제 도입을 전후로 'CP(Compliance Program. 공정거래자율준수프로그램)'는 제약업계의 화두로 자리잡았다.
지난해 한국제약협회는 기업윤리헌장 선포식을 열고 리베이트 근절, 공정한 경쟁과 투명한 유통질서 확립, 적극적인 R&D 투자, 의약품 안정적인 생산·공급 등을 실천키로 다짐했다.
제약사들도 적극 동참에 나섰다.
제약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8월말 기준 회사 차원에서 준법경영 선포식을 갖거나 자율준수관리자를 지정하는 등 윤리경영에 선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제약회사는 39곳으로 1차 조사됐으며 8개사가 금명간 도입 준비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1차 39개사의 CP 운영팀과 자율준수관리자 등 회사내 윤리경영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인력은 166명으로 집계됐다.
협회는 회원사들을 대상으로 CP 운영현황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L부장에 따르면 업계가 대대적으로 CP 강화에 나서다보니 CP를 도입하지 않는 회사는 비윤리적인 회사라는 이미지가 생겼고 별도로 CP 전담조직을 꾸리기 어려운 소규모 제약사들도 부랴부랴 구색 갖추기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L부장은 "연매출이 수천억원에 달하는 대형제약사들은 5~7명 정도의 전담 조직을 갖출 수 있지만 우리 제약사 매출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며 "그래도 구색을 갖추려다보니 나 혼자 CP 업무를 맡게 됐고 명함도 새로 하나 파게 됐다"고 토로했다.
두 종류의 명함을 가지고 다니다보니 가끔 어떤 명함을 내밀어야 할 지 헷갈릴 때도 있다.
그는 "건강보험심평원에서는 약가 담당 명함을 내밀지만 다른 제약사 사람을 만날 때는 CP 담당 명함을 줘야 할 때도 많다"며 "가끔 명함을 잘 못 줄 때도 있어 내 명함임에도 불구하고 꺼낼 때 꼭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회사만의 상황은 아닐 것"이라며 "연매출이 1000억원 미만인 제약사에 근무하는 직원 중에선 나처럼 여러 종류의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이들이 상당수일 것"이라고 귀띔했다.
무엇보다 다국적제약사와 코프로모션을 하다보니 해당 다국적제약사의 CP 강화 방침에 따른 영향을 많이 받게 됐다.
문제는 다국적제약사에 맡게 설계된 운영 방침을 소규모 제약사에 적용하다보니 마케팅에 장벽이 생겼다.
L부장은 "모 다국적제약사와 코프로모션을 진행 중인데 최근 해당 다국적제약사에서 CP 운영방침이 강화됐다며 들어오라고 한 적이 있다"며 "그 다국적제약사의 CP 강화방침은 한마디로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코프로모션 계약에 따라 팔아야 할 물량이 정해져 있는데 물량은 채우되 해당 제품과 관련한 일체의 마케팅 활동은 하지 말라니 답답한 노릇"이라며 "다국적제약사 수준의 CP 활동을 우리처럼 작은 제약사에 적용하면서 매출까지 올리기란 쉽지 않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근무하는 제약사 뿐 아니라 상당수 소규모 제약사의 상황도 비슷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CP 운영은 한마디로 매출이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투명성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라며 "연매출이 수천억원에 달하는 대형 제약사는 매출이 10% 감소하는 것을 버틸 수 있겠지만 연매출 수백억원에 불과한 소규모 제약사에게 매출 10% 감소는 견디기 어려운 수준이다. 결국 중소형 제약사에게 CP 운영은 요식행위에 불과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털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