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열흘째다. 이날은 갈 길이 먼 탓인지 5시반 모닝콜, 6시반 식사 그리고 7시반 출발이다. 여행이 10일째 되니 일어나서 출발하기 까지가 일상처럼 진행된다.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고 보니 쓰레기를 담은 비닐봉지가 걸려있고 앞 그물에도 쓰레기가 가득이다. 어제 이 자리에 앉았던 이가 남겨놓은 것들이다. 누구인지는 알만하나 내색까지 할 일은 아니다. 그래도 속으로는 한 마디 한다. '욕먹을 짓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어제 오후에 비가 쏟아지더니 이날도 두터운 구름이 낮게 깔린다. 우리가 향하는 살라망카에도 비올 확률은 20%란다. 살라망카는 대학도시이다. 그래서 인지 조형진 가이드의 아침음악방송에서는 1973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2위에 입상한 노래 '에레스 뚜(Eres Tu)'를 들려주었다. 7명의 살라망카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는 '모세다데스(Mocedades)'가 부른 곡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78년에 대학연합혼성그룹 쌍투스가 '그대 있는 곳까지'라는 제목으로 번안하여 불러 제 2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당신은 내 마음의 샘에서 솟아나는 샘물과도 같은 사람, 바로 당신은 그런 사람입니다'라는 구절처럼 당신의 의미를 새기는 노랫말로, 당시 프랑코독재에 시달리던 스페인 국민들에게 희망을 던져준 노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합창단이 레파토리로 삼을 만큼 인기를 끌고 있다.
이날은 한국에서 온 세 팀이 같은 코스를 여행하게 된다고 했다. 관광지는 물론 식당, 심지어는 휴게소의 화장실까지 길게 줄을 서야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한발쯤 앞서 가자고 조 가이드는 권고한다. 여행 가이드의 키포인트를 잘 읽고 있다. 화장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짚자면, 스페인 단체여행은 여성들이 많아서인지 여성들이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길게 줄을 서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줄을 서다보니 마침 비어 있는 장애인 화장실을 이용한 덕분에 편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 여성을 보았다. 하지만 장애인 화장실은 언제 올지 모르는 장애인이 편하게 쓸 수 있도록 항상 비워두어야 한다. 장애인 화장실을 쓰는 것은 요령의 문제가 아니라 교양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파티마를 출발하여 스페인 국경을 넘어 살라망카 까지 5시간 가까이 버스로 이동해야 했다. 살라망카는 카스티야-레온 지방을 구성하는 9 개 주 가운데 하나인 살라망카주의 주도이다. 2005년 기준으로 16만 명이 토르메스강을 끼고 있는 살라망카에 살고 있다. 3만 명이 이르는 학생들이 살라망카대학을 다니고 있어 살라망카대학과 관광객들이 도시를 먹여 살리고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심지어는 살라망카 대학이 세워진 이후 이곳은 교회가 아니면 대학 건물이라 생각하면 된다 할 정도로 대학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고 한다. 하얀 색이 주조를 이루는 스페인의 다른 도시와 달리 살라망카의 건물들은 붉은 색조가 두드러지는데, 이 고장에서 흔하게 얻을 수 있는 붉은색 사암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살라망카의 구시가는 198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살라망카대학 이야기가 나오니,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이야기를 마무리할 무렵, 그레고리우스가 살라망카대학의 강의실에서 에스테파니아 에스피노자를 만나는 장면이다.
"강의실에는 책상이 갖추어져 있었고, 앞쪽 높은 곳에 교탁이 놓여 있었다. 수도원 같은 소박한 우아함을 풍기는 그곳이 학생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큰 강의실이었지만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마지막 줄까지 들어찼다. 통로 바닥에 앉아 있는 학생들도 있었다. (…) 그녀의 목소리는 안개가 낀 듯한 어두운 알토였고, 딱딱한 에스파냐 낱말들에서 남아 있는 포르투갈어의 부드러움이 묻어났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그녀는 마이크를 껐다. 대성당도 울릴 만한 목소리, 듣는 사람들이 강의가 절대 끝나지 않기를 바랄만한 시선이었다."
살라망카는 고대 로마시대 이전 켈트족이 만든 요새를 중심으로 발전했고, 기원전 3세기 카르타고가 멸망하고 로마가 지배하면서 상업적 허브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살라망카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218년 레온의 알폰소 9세왕이 살라망카대학에 국왕의 보호를 받는 특권을 부여한 일이다. 1134년 설립된 살라망카 대학은 스페인 최초의 대학이며 서구에서 네 번째로 오래된 대학인데 교황 알렉산더 4세가 인정한 최초의 대학이라는 명예를 가지고 있다.
1551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샤를 5세는 의학자이며 해부학자인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의 학문이 가톨릭 교의에서 벗어났는지 여부를 조사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에 베살리우스는 살라망카로 와서 조사를 받아 무죄로 판명받은 일도 있다고 한다.
근대해부학의 창시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Andreas Vesalius, 1514년 ~ 1564년)는 벨기에 출신으로 그때까지 절대적이었던 갈레노스의 해부학이 동물을 해부하여 얻은 지식을 사람에 적용한 것임을 밝혔다. Q뿐만 아니라 당시까지 금기시하던 시체해부를 통하여 쌓은 지식을 바탕으로 1543년 [인체 해부학 대계]라는 책을 저술하여 새로운 개념의 인체해부학의 토대를 세웠다. 베살리우스는 1543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시의가 되었고, 1559년에는 스페인왕 카롤로스 1세의 아들 펠리페2세의 시의가 되었다.
살라망카로 들어선 우리는 마요르광장에 가까운 중식당에서 뷔페식으로 점심을 마치고 광장으로 돌아왔다. 금강산도 식후경인 것이다. 마요르광장은 스페인왕위계승전쟁의 산물이다. 1770년 스페인왕 카를로스 2세가 후계 없이 사망하자 왕위는 프랑스왕 루이 14세의 손자 앙주 필리프에게 넘어가 펠리페 5세가 즉위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가 스페인 왕위에 대한 합스부르그 왕가의 권리라면서 자신이 스페인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그 왕가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 사이에 14년에 걸쳐 전쟁이 있었다.
전쟁은 결국 부르봉왕가의 승리로 끝나 펠리페 5세가 스페인 왕위를 지켰고, 펠리페 5세는 왕위계승전쟁 기간 동안 자신을 지지해준 살라망카시에 보답으로 마요르 광장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광화문광장이나 시청앞 광장처럼 공간이 열려 있는 우리네 광장과는 달리 스페인에서는 광장의 개념이 다소 다른 것 같다. 세비야의 스페인광장처럼 살라망카의 마요르광장 역시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폐쇄적인 공간이다. 아마도 투우경기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건설하라는 펠리페 5세의 지시를 반영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요르광장은 스페인 전통의 바로크양식으로 1729년 착공하여 1755년 완공된 살라망카의 심장이라고 할만한 장소이다. 4층의 건물이 광장을 에워싸고 있는데, 모두 6개의 출입구가 서로 다른 거리로 향하고 있다. 1층에는 레스토랑, 아이스크림 가게, 여행자를 위한 상점, 보석가게, 약국 등이 들어있고, 중앙에는 시청이 자리 잡고 있다. 시청이 있는 쪽에는 유명한 시계가 걸려 있는데,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시계 아래서 만나실까요?(Shall we meet under the clock?)"라고 한다는 것이다.
광장 쪽으로 난 발코니에서 광장을 내려다보면 좋을 것 같아 2층으로 난 계단을 기웃거렸더니 올라가지 못하게 막는다. 사적공간이라는 이유이다. 자료를 보니 광장 쪽으로 모두 247개의 발코니가 있는데 사적 공간이라고 한다.
광장과 1층의 가게 사이의 회랑은 88개의 아치로 구분되어 있고, 아치 사이의 벽면에는 초상이 새겨져 있다. 남녀 구분이 없는 것을 보면 당시 스페인사회가 개방적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데 특히 대학도시답게 젊은이들이 많다. 특이한 복장을 한 젊은이들이 무리지어 모여들고 있는 것을 보면 가장행렬이나 축제가 있는 모양이다. 젊음의 풋풋함은 양의 동서가 다르지 않다. 광장 옆에는 재래시장이 있어서 볼거리가 있다고 하는데 이제는 폐쇄되었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