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로 운전자가 서울 강북삼성병원 응급실에 실려왔다. 경찰은 운전자의 음주 여부 확인을 위해 채혈을 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보호자는 환자 치료가 먼저라며 채혈을 거부하면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의료진은 응급실 야간 당직 중이던 원무과 직원 엄재민 씨에게 환자 및 보호자 동의 없이 채혈을 해도 괜찮으냐고 물었다.
하지만 엄 씨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도 법리적인 부분은 잘 몰랐기 때문이다. 경찰이 요청하니까 채혈을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환자 동의 없으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모호했다.
그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보호자와 경찰이 합의를 해 채혈은 무사히(?) 끝나버렸다.
그렇게 환자 동의 없는 채혈에 대한 질문의 답은 찾지 못하고 한밤중 응급실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엄재민 씨(30)는 보다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 생각은 변호사가 돼야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고, 그길로 그는 병원을 그만두고 2012년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리고 불과 보름 전인 지난 10일, 그는 변호사 시험 합격증을 받고 새내기 변호사가 됐다. 합격 통보를 받기 전 법무법인 서로는 엄 변호사를 찜했고, 그는 지난 1월부터 이미 서로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엄 변호사는 "병원 행정직으로 근무했을 때 원무팀 안에 법무 파트가 있었다. 야간 당직을 설 때면 해당 직원이 법무 업무까지 커버했어야 했다. 전문적인 지식이 있었다면 의료진은 물론 환자와 소통도 보다 원활했을 것"이라며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고 말했다.
안정적 직장으로 꼽히는 병원 행정직을 그만두고, 3년 동안 법 공부를 하면서 그는 제대로 대답 하지 못 했던 '경찰이 요구하지만 환자 동의 없는 채혈 가능 여부'에 대한 정답을 찾았을까.
엄 변호사는 "음주 측정 목적으로 채혈을 하면 안 된다. 채혈도 치료 목적이 아니면 환자 동의를 받아야 한다. 동의 없이 한 채혈은 증거로도 쓰이지 않는다"라고 명쾌하게 답했다.
그러면서 "병원 업무에서 의료진은 물론 경찰도 잘 인지 못할 정도로 관례적인 부분이 많다"며 "당시는 아무 문제없이 넘어갔지만 나의 대답 하나로 환자가 추후에 의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법무법인 서로에서 근무한지 4개월째. 변호사 자격증을 딴지는 보름이 채 안 된 시간. 엄 변호사는 아직 수습 변호사다. 사건을 맡거나 하지는 않고 의뢰인 상담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앞으로 그는 병원 행정직에서 일했던 경력을 살려 '의료소송'을 전문적으로 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단다.
엄 변호사는 "서로를 가기로 결심했을 때 의료소송 시장이 얼마나 있고, 병원에서 일한 경력을 얼마나 살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 변호사도 전문성을 갖춰야 하는 시대인 만큼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며 "의사 출신 변호사는 비교적 많이 볼 수 있지만 병원 행정직으로 근무하다가 변호사가 된 경우는 드물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의사보다 전문적인 의료지식은 부족할지라도 의료법이라는 법적 지식은 같은 선에서 출발한다. 여기에 실무적, 경영적인 경험을 접목시켜 환자, 병원 직원의 입장을 공감할 수 있는 나만의 강점이 있다"고 자신하며 "물론 법에 필요한 의학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귀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