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A종합병원에서 봉직의로 일하던 의사 B씨는 지난해 가을 병원장에게 해고 통보를 받았다. 수익에 신경쓰라는 병원장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서 쌓인 갈등이 해고 통보로 이어진 것. B씨는 퇴직금은 물론 약 2개월치의 급여와 인센티브를 받지도 못하고 병원을 나와야 했다.
B 씨는 "부당 해고"라며 법에 억울함을 호소하기로 했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다. A병원에서 근무했다는 증거로 내세울 수 있는 '근로계약서'가 존재하지 않아 불리한 상황에 놓인 것.
#. 서울 C병원에 근무하다 해고 통보를 받은 의사 D씨. 그는 병원장이 다른 병원을 소개해 줘 면접을 봤다. 그런데 면접을 본 병원에서는 D씨를 채용할 생각이 없었다. 알고 보니 D씨를 내보내기 위한 C병원의 꼼수였던 것.
C병원은 면접을 봤다는 사실을 내세우며 D씨에게 병원을 나가라고 했다. '면접'에 발목 잡힌 D씨와 C병원 사이에도 문서화된 근로계약서는 없었다.
13일 병의원 노무 전문가에 따르면 개원 대신 봉직의를 선택하는 추세가 늘면서 '근로계약서' 때문에 울고 웃는 의사들도 늘고 있다.
'근로계약서를 굳이 쓸 필요가 없다'는 관행을 병원들이 부당 해고의 도구로 악용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병원 입장에서도 안심할 수 없다. 봉직의를 포함한 직원들이 근로계약서가 없다는 것을 이용해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해당 병원을 고용노동부에 신고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의료계에 만연해 있는 근로계약서 미작성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노무법인 나라 김기선 노무사는 "의사들은 선후배, 지인으로 얽혀 있다보니 계약서를 쓰지 않는 특이한 문화가 있다. 여기다가 급여가 고액이라서 네트 페이를 약속하면서 퇴직금은 없다는 식으로 구두계약을 많이 한다"고 설명했다.
김 노무사는 "예전보다 근로계약서를 쓰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는 있지만 아직은 의사들의 고유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법무법인 서로 최종원 변호사는 근로계약서의 존재만으로도 분쟁 가능성이 줄어드는 데다가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이길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강조하며 근로계약서 작성 팁을 공개했다.
최 변호사는 "봉직의가 늘어나는 추세다 보니 의사들 사이에서도 퇴직금 등을 규정한 근로계약서 개념이 생기고 있다"며 "근로계약서를 쓰는 것만으로도 법적으로 안전장치가 생기지만 여기에 야간 근로 수당 지급 여부, 퇴직금, 급여 내용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면 더 좋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근로계약서에 야간근로수당 지급 여부를 명시하지 않으면 법률상으로 병원 측은 야간근무를 한 의사에게 근로 수당을 줘야 한다. 즉, 야간수당을 급여에 포함시킬지 여부를 근로계약 시 명시하면 추후 분쟁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 변호사는 "대외적으로는 공동 경영자로 돼 있는데, 실제로 봉직의라면 근로계약서를 따로 하나 작성해놓는 것도 좋다"고 귀띔했다.
김기선 노무사도 "근로계약서에 명시해야 할 내용은 근로기준법 17조에 나와 있다. 법은 최소한의 요건이기 때문에 원장과 봉직의가 구체적인 계약 내용에 대해 추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근로계약서에 대한 인식 전환.
최 변호사는 인식을 바꾸기 위해 의사 개인보다 대한의사협회나 보건복지부 등 유관기관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근로계약서를 안 쓰면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의사 사회에 강하게 퍼져있다. 이 때문에 먼저 근로계약서를 쓰자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은 분위기"라고 지적하며 "개인보다는 유관 기관이 나서서 근로계약서를 쓰도록 적극 권장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