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모스크에서 나와 톱카프 궁전으로 이동한다. 모스크 앞에는 널따란 정원이 펼쳐져 있다. 정원의 끝에서 돌아서보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블루모스크의 모습이 강건해 보이면서도 아름답다. 전성기보다 못한 제국의 사정으로 황금 미나렛을 세우지 못한 술탄의 심기는 잠시 불편했을지 몰라도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 후손들을 먹여 살리는 소중한 유산을 남긴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톱카프궁전으로 가는 길은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지나친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에 조금 못 미쳐 하세키 휘렘 하맘(haseki Hürem Hamam)이 숨어 있다. 가이드가 따로 설명하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하맘은 중동지역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전통적인 공중목욕탕이다. 하세키 휘렘 하맘은 술탄 슐레이만1세의 명령으로 1556년에 완공된 이 하맘에서 나오는 수익금은 아야소피아 대성당에서 사용하도록 했다.
하세키 휘렘은 술탄 슐레이만1세의 황후이자 셀림2세의 모후이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본명은 알렉산드라 리소노브스카(Alexandra Lisonovska)이나, 알렉산드라 라 로사(Alexandra La Rossa)로 불리기도 하는데, 서방에서는 록셀라나(Roxelana)로 알려져 있다. 오스만제국에서 하세키 휘렘이 주목받는 것은 할렘의 모든 여성들이 제국의 대를 이을 남아를 낳는 역할에 머물렀던 전례를 깨고 제국 최초로 술탄과 정식을 결혼하고, 황후의 지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술탄 슐레이만의 지극한 사랑이 만들어낸 변화였을 것이다.
성직자의 딸인 휘렘은 어려서부터 많은 교육을 받아 지혜로웠고 술탄이 많은 도움을 구할 정도로 지적이었다고 한다. 휘렘으로 말미암아 술탄이 오스만제국의 오래 된 관습들을 깼다고 해서 총명한 군주를 흐리게 한 악녀로 인식되어 왔지만, 현대의 페미니스트들은 술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한 주체적 여성으로 재해석한다.
하이든의 교향곡 제63변 C장조에 붙어있는 프랑스어 부제 ‘록슬란’이 휘렘을 가리킨다고 한다. "나의 동반자, 나의 사랑, 빛나는 나의 달빛이여 / 나의 목숨과 같은 벗, 나의 가장 가까운 이, 아름다움의 제왕인 나의 술탄(…)"으로 시작되는 연애시를 헌정할 정도로 술탄의 사랑은 지극했던가 보다.(1)
아야 소피아 박물관이 끝나는 지점에 비진탄제국의 아크로폴리스 자리에 세운 톱카프 궁전의 제1문이 서 있다. 톱카프 궁전의 제1문 바로 앞 오른쪽으로 ‘아흐메드3세의 샘’으로 불리는 화려한 정자가 있다. 비잔틴 제국시절부터 있던 샘터에 아흐메드3세가 정자를 지었는데 지금은 물이 나오지 않는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메흐메드2세가 지은 톱카프궁전은 15세기 중순부터 19세기 중순까지 오스만제국의 술탄이 거처하던 곳이다. 메흐메드2세는 지금의 이스탄불대학교가 있는 구시가지의 세 번째 언덕에 궁전을 지었는데, 이 궁전을 완공하고 불과 몇 년 뒤에 동로마제국의 성곽이 있던 첫 번째 언덕, 즉 보스포루스해협과 마르마라해, 황금뿔만이 합류하는 곳을 굽어보는 첫 번째 언덕 위에 새로운 궁전을 세우도록 명령해서 1478년 완공하였다.
언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짚어보면, 콘스탄티누스대제의 명령에 따라 건설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7개의 언덕 위에 세워진 로마를 따라서 만든 7개의 언덕 위에 건설했다고 한다. 그리고 보면 7개의 언덕 위에 건설된 리스본 역시 로마의 지배를 받은 지역이다.
새로운 궁전이 완공 된 다음 그때까지 사용하던 궁전을 옛날 궁전이라는 의미로 '에스키 사라이(Eski Sarayı)'라고 부르고, 새로 지은 궁전은 새로운 궁전이라는 의미로 '예니 사라이(Yeni Sarayı)'라고 불렀는데, 궁전 입구 양쪽에 대포가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톱카프 사라이(Topkapı Sarayı)'라고 불렀다. 터키어로 '톱'은 대포를, '카프'는 문 그리고 '사라이'는 궁전을 의미한다.
톱카프 궁전에는 세 개의 문과 네 개의 넓은 중정(中庭)이 있다. 첫 번째 문은 술탄의 문(Saltanat Kapısı)으로 아랍어로는 '바브 휘마윤(Bâb-ı Hümâyûn)'이라 부른다. 문의 바깥쪽에는 "알라여 이 궁전을 지은 사람의 영광이 영원하도록 하소서. 알라여 그의 힘을 더욱 강하게 하소서"라고 아랍어로 적혀 있다.(2)
황제의 문에 들어서면 예니체리 마당이라는 별칭으로 부르는 제1중정을 만난다. 궁전을 지키는 예니체리 근위대가 있던 곳이다. 제1중정은 일반 백성들의 출입이 허용되던 곳으로 진료원, 장작 저장소, 제빵소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동로마 제국 때 지은 하기아 이레네 성당과 화폐 제작소만 남아 있다.
예니체리(yeniçeri)는 평상시에는 수도의 경비를 맡고 있다가 전쟁이 나면 술탄과 함께 참전하여 용맹을 떨친 술탄의 친위부대이다. 오스만 제국 초기인 1364년에 술탄 무라드1세가 창설하였다. 투르크어 예니센 에서 유래한 말로 “새로운 병사”라는 뜻이다. 창설초기에는 전쟁포로나 점령지의 기독교 소년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구성하였다. 병사들은 이슬람과 투르크의 전통을 익혀 이슬람으로 개종해야 했고 엄격한 훈련을 거쳐야 했다. 술탄의 개인 경호부대였기 때문에 알라와 술탄 이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았다.
오스만제국이 확장되어가면서 예니체리 부대의 지위도 높아지기 시작했는데, 부대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예니체리들은 발탁되어 중요한 국사를 맡기도 했다. 이들은 점차 권력집단이 되어갔고 타락해갔다.
정부요직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시로 반란을 일으켰고, 1622년에는 심지어 예니체리를 해체하여 군대조직을 일신하려고 했던 오스만2세를 암살하기도 했다. 1807년에는 유럽식으로 군대를 현대화하려던 술탄 셀림 3세를 하야시키고 마무드 2세를 술탄에 옹립했다. 대세의 흐름에 저항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술탄까지도 갈아치웠다는 예니체리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일본식 신식군대 별기군과의 차별에 무력함을 느끼던 구식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결국 무너진 임오군란이 떠오른다. 임오군란 초기에 일시적으로 기선을 제압했다지만 결국은 몰락하고 말았던 것처럼 예니체리 역시 1826년 자신들이 옹립한 마무드2세의 개혁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몰살을 당하고 해체되고 말았다.(3) 시대적 흐름을 잘 읽고 변화에 따라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톱카프 궁전의 첫 번째 문을 지나 두 번째 문으로 향하다 보면 왼쪽으로 카페가 있고, 그 곁에는 다소 퇴락한 건물이 보인다. ‘신성한 평화’를 의미하는 하기아 이레네 성당이다. 비잔틴제국이 처음 세운 성당으로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신전 자리에 세워졌다. 아야소피아 성당이 건설되기 전까지 동방정교회의 대주교좌 성당이었다. 지금은 퇴락해 보이지만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이 공의회에서는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는 영원 전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닌 피조물이라는 아리우스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성부와 성자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아타나시오스의 성삼위일체설을 정통교리로 하는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하였다.(4)
하기아 이레네 성당은 532년 니카 반란 때 아야 소피아 대성당과 함께 불타버렸으나 유스티니아노스 황제에 의하여 546년 다시 완공했으며, 740년에는 지진으로 파괴되었지만 레오3세가 복구했다. 아야 소피아 대성당이 비잔틴제국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하여 웅장하게 지어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검박하게 지어졌다. 오스만제국이 들어선 이후에 이곳은 예니체리의 무기고로 사용되다가 제국말기에는 전쟁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특별전시회나 이스탄불 여름축제기간 중에 연주회가 열리고 있다.(5)
참고자료
(1) 나무 위키. 휴렘 슐탄.
(2) 이희철 지음. 터키: 신화와 성서의 무대, 이슬람이 숨쉬는 땅 95-102쪽, 리수, 2007년
(3) 위키백과. 예니체리.
(4) 위키백과. 공의회.
(5) 유재원 지음. 터키, 1만년의 시간여행 84-90쪽, 책문,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