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리아누스 신전에서 켈수스(Celsus) 도서관으로 가는 쿠레테스(Kouretes) 길은 대리석으로 포장되어 있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신관을 가리키는 쿠레테스에서 따왔다고 한다. 대리석 기둥과 석상이 서 있었음직한 좌대가 길가에 늘어서 있다.
서기 135년에 완공된 켈수스도서관은 110년 소아시아의 집정관을 지낸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퀼라(Gaius Julius Aquila)가 92년에 집정관을 지낸 아버지,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켈수스 폴레마이아누스를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도서관의 지하에 켈수스의 관을 모셨다고 한다. 그가 남긴 2만5천 데나리온은 도서관을 짓고 양피지로 된 1만2천권의 장서를 구입하고, 도서관을 유지할 정도로 막대한 돈이었다고 한다.
도서관과 장서들은 262년에 지진과 화재로 파괴되고 파사드만이 남았다. 400년 무렵 오락시설로 전용된 파사드 마저도 10~11세기 무렵 지진으로 무너졌다. 1970년에 독일 고고학자 볼커 미카엘 스트록카(Volker Michael Strocka)가 시작한 재건운동이 결실을 맺어 1978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아홉 개의 계단 위에 모두 열여섯 개의 코린트식 기둥을 세운 2층 건물이다. 1층과 2층의 기둥사이 공간을 엇갈려 배치한 독특한 모습이다. 아래층 기둥 사이에 만든 네 개의 벽감에는 각각 켈수스가 가졌던 네 개의 미덕을 상징하는 여신상을 세웠다.(1) 왼쪽부터 지혜(Wisdom, Sophia), 덕(Virtue, Arete), 사고(Intelligence, Ennoia), 학문(Knowledge, Episteme)이다. 원래 에페소스에 있던 여신상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에페소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이곳에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켈수스 도서관의 내부에 들어서면 열람실이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아침 햇빛이 잘 들어오도록 한 배치라고 한다. 입구의 맞은편에는 학문과 예술의 여신 아테나 상이 서있던 공간이 있다. 페르가몬 도서관처럼 3층의 서고가 둘러싸고 있고, 외벽과 서고 사이에는 91cm의 통로를 두었다. 책에는 치명적인 습기를 막기 위한 장치였고, 이 통로를 따라가면 켈수스의 대리석 석관이 있는 현실에 이르는 이중구조다.
켈수스도서관에서 바라보면 정면에는 유곽으로 사용된 건물이 있다. 1세기 무렵의 전형적인 유곽형식의 2층짜리 주택이다. 대리석으로 된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세면대가 있는 대기실이 나온다. 그 안에는 분수가 있는 작은 정원을 중심으로 욕탕이 딸린 방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도서관에서 오른쪽으로는 코린트식 기둥 네 개가 서 있다. 본래는 3층으로 되어 있던 하드리아누스황제의 문의 일부이다.
도서관 왼쪽 옆으로는 남쪽 아고라의 정문이 있다. 세 개의 아치형으로 된 문은 기원전 3세기에 리시마코스가 건설한 신도시의 시장으로 통하는데, 기원전 3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그의 사위 그리파에게 헌정된 것이다.(2) 문을 나서면 아르테미스 여신을 모신 작은 동굴이 있고, 대리석길로 나갈 수 있다.
아카디아대로가 원형경기장 앞에서 오른쪽으로 돌면서 시작하는 대리석길은 켈수스도서관 앞 유곽부근에서 쿠레테스거리로 연결된다. 널찍한 사각형 대리석이 깔려 있어 보기도 좋고 걷기도 편한 대리석길의 양편으로는 코린트식 기둥이 늘어서 있는데, 그 옛날 이 기둥에 횃불을 걸어 가로등을 삼았다고 한다.
원형극장 쪽으로 이동하는 가이드를 따라가느라 바빴는데 대리석길 중간에 있는 ‘네로의 홀’ 부근의 인도에는 인류 최초의 광고라고 알려진 대리석판이 있다고 한다. 왼발과 왕관을 쓴 여인 그리고 사각형이 새겨진 유곽 광고로, “여왕처럼 예쁜 여자가 있습니다. 이곳을 출입하려면 발이 그림보다 커야 하고 어음도 받습니다.”라는 내용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드디어 항구로부터 올라오는 아르카디아대로가 닿은 원형극장에 도착했다. 4세기 무렵 플라비우스 아르카디우스황제는 항구에서 도심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수시로 넘치는 강물에 잠기는 불편함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공사를 벌였다. 도로를 돋우고 넓혀 길이가 550m 넓이가 10m에 달하는 아르카디아대로를 만든 것이다. 도로에는 대리석을 깔았고, 길 양편으로는 코린트식 기둥을 세워 밤에는 횃불 가로등을 걸어 뱃사람들이 쾌적한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르카디아대로의 끝에는 원형극장이 있다. 피온산 서쪽 기슭에 있는 이 원형극장은 기원전 100년경에 처음 지어졌다가 기원후 1세기 무렵에 대대적으로 확장되었다. 2만5천명이 동시에 입장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의 원형극장은 당시 제일 큰 규모였을 것이다. 이토록 커다란 극장의 무대에서 주고받는 대사가 좌석 맨 끝까지 전달될 수 있도록 객석 아래에 청동관과 토관을 묻어 공명이 되도록 보완했다고 한다.
2층으로 되어 있던 무대는 1층만 남아 있다. 무대의 아래로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여덟 개의 방이 있는데, 검투사 경기가 있는 날에는 검투사와 맹수가 이동하는 통로가 되었다. 로마시대에는 연극보다는 검투사경기가 자주 열렸다고 한다. 최근에는 세계적인 가수들의 공연을 열기도 했는데, 음향효과는 여전히 뛰어나다고 한다.
원형극장에서 자유시간을 얻었다. 대부분 일행들은 북문 쪽에 있는 선물가게로 몰려간 사이에 아내와 나는 안내표지를 따라 성모 마리아교회를 찾았다. 원형극장에서 아카디아대로를 따라가다 북문으로 가는 도로가 아닌 왼쪽 샛길을 따라가면 된다. 에페소스지방에는 사도 요한이 서기 37년에서 48년 사이에 성모 마리아를 이곳으로 모시고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예루살렘에서 63세로 죽었다는 것을 정설로 한다.
에페소스에서 남쪽으로 7km쯤에 있는 ‘마리아의 집’은 기적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19세기 중엽 독일 수녀 카테리나 에미리히가 꿈에서 성모 마리아를 만났는데 그녀가 안식한 집의 위치와 모습을 상세하게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카테리나수녀는 에페소스 근처에도 와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카테리나 수녀는 1824년 사망했고, 1891년 그녀가 생전에 남긴 책을 토대로 탐사에 나선 나사렛파의 에오겐 풀린 수사가 ‘성모 마리아의 집’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에페소스 북쪽에 있는 성모마리아의 교회는 원래 예술의 여신, 무사이(Mousai)에게 헌정된 건물이 있던 자리이다. 3세기 무렵 사람들이 폐허의 서쪽에 바실리카 형식의 교회를 세워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였다. 이 교회는 성모마리아에게 봉헌된 첫 번째 교회이다. 이때부터 에페소스는 성모 마리아를 수호신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431년 이 교회에서 제3차 공의회가 열렸다. 성모 마리아의 교회 역시 오랜 세월이 흘러 폐허가 되었지만 지금은 교회 안쪽 벽의 일부가 복원되어 있었다.
성모마리아의 교회 왼쪽으로도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곳에는 시장, 광장, 가게 등이 들어서 화려했다고 한다. 교회 오른쪽 너머에는 130년에 하드리아누스황제에게 헌정된 올림페이온 신전 터가 있었지만 400년 무렵 광신적인 그리스도교도들에게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에페스 유적을 떠난 우리 일행이 이즈미르에 있는 라마다 르네상스 플라자호텔에 든 것은 4시반경이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 있는 여유이다. 그러면 에페스를 더 자세하게 돌아볼 수도 있지 않았던가 싶다. 저일찍 저녁을 먹고 쉬는데 미세하게 떨리는 느낌이 지나간다. 혹시 지진이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된다. 터키 역시 지진 피해가 많은 곳이 아니던가 말이다. 떨림이 반복되지 않아 안심을 했다. 다행이다.
참고자료
(1) Wikipedia. Library of Celsus. https://en.wikipedia.org/wiki/Library_of_Celsus
(2) 유재원 지음. 터키, 1만년의 시간여행2, 40-47쪽, 책문,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