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헌은 보스포루스해협에서 유람선을 타는 일이야 말로 이스탄불관광의 꽃이라고 했다.(1) 뱃머리에 올라 쏟아지는 바람을 맞으면서 바라보는 해협은 세상의 근심과 아쉬움을 날려버리기에 부족함이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양손을 펼치면 왼손으로는 유럽대륙을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아시아대륙을 붙잡을 것 같이 좁은 해협에서 세상의 근심걱정을 날려버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또한 세상을 지배한 유럽대륙의 기상과 비상하는 아시아대륙의 생동감을 느껴보라는 권유 역시 와 닿지 않는다. 유럽이 세상을 지배한 것은 20세기 이후의 백여 년에 불과할 뿐이다. 로마제국도 겨우 지중해를 둘러싼 지역만을 다스린 우물 안의 개구리였을 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아시아가 융성할 적에는 유럽에 많은 것을 베풀었지만, 유럽이 힘을 얻었을 적에는 세상을 눈아래 깔고 파괴하는데만 골몰했던 것 같다. 심지어는 20세기 들어 짧은 기간 동안 이룩한 발전을 나누어준다면서 실질적으로는 착취하고 지배하려는 속셈을 숨기고 있었던 것 아닌가? 지배하고 지배를 당하고 하는 것도 오랜 역사를 통하여 보면 눈 깜빡할 사이에 불과하다. 보스포루스해협을 가르며 달리는 유람선에 몸을 싣고 보니 이 좁은 곳을 둘러싸고 티격태격한 인간의 과거사가 그저 허망하지 싶다.
보스포루스다리까지를 왕복하는 유람선에는 우리 일행만 탑승해서인지 여유롭다는 느낌이 든다. 위층에 올라가보니 아무래도 가까운 유럽쪽 해안으로 눈이 간다. 방금 구경한 돌마바흐체궁전을 비롯하여 지금은 호텔로 개조해서 영업하고 있다는 츠라안궁전이 얼마나 대단한 규모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보스포루스대교 쪽 하늘이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히고 휘몰아치는 바람이 심상치 않다. 이내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진다. 결국 위층에서 실내공간인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했다. 빗물이 흘러내리는데 더하여 뿌옇게 흐려진 창문너머로 아시아쪽 해안을 구경한다. 유럽쪽 해안에는 대규모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것과는 달리 아시아쪽 해안에는 주택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유람선 위층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누비는 즐거움이 더했을 것 같은데 아쉽다. 오르한 파묵은 보스포루스에서 노는 즐거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거대하고, 역사적이고, 방치된 도시 속에 살면서 깊고, 힘차고, 변화무쌍한 바다의 자유와 힘을 당신의 마음속에서 느끼는 것이다. 보스포루스의 급류에서 빠르게 전진하는 여행객은 복잡한 도시의 더러움, 연기, 소음의 한가운데서 바다의 힘이 자신에게 전이되고, 그 모든 군중, 역사, 건물 속에서 여전히 홀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2)”
아마도 이스탄불에 사는 터키 사람이기에 가지는 특별한 느낌이 아닐까 싶다. 오르한 파묵은 <이스탄불>에서 자전적인 내용을 적으면서 또한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의 변화, 특히 보스포루스해협에 관한 것들을 많이 다루었다. ‘이스탄불에서는 육 개월 머물러야 한다네’라고 친구 루이 뷔에에게 편지를 썼던 플로베르처럼 서양의 여행자가 남긴 이스탄불에 대한 인상을 비롯하여 보스포루스 풍경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남긴 앙투안 이그나스 멜링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파묵에게 보스포루스는 영원한 탐구의 대상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보스포루스의 물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소식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지도 모른다. 파묵은 소설 <검은책>에서 보스포루스부근의 지각이 올라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적었다. 그리고 미래에는 ‘보스포루스해협’이라고 했던 천국이 번쩍이는 이빨을 유령처럼 드러낸 진흙투성이 난파선이 드문드문 번들거리는 시커먼 늪으로 변하지 않을까 걱정한다.(3)
보스포루스해협의 바다를 잘 들여다보면 바다 속에 있는 길고 좁은 협곡을 따라 흑해에서 지중해 방향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바닷물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반면 보이지 않는 깊은 바다 속에서는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물의 흐름이 있다고 한다. 유라시아대륙에서 흑해로 흘러드는 강물이 섞여든 흑해의 가벼운 물은 바다의 위쪽을 따라 지중해로 흘러가고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무거운 바닷물이 흑해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7500년 전 빙하기가 끝나기 전까지 보스포루스는 유럽과 아시아 대륙 사이에 있는 깊은 계곡으로 된 땅이었다. 빙하기가 끝나면서 빙하가 녹은 물이 흑해와 에게해 그리고 마르마라해에서 쏟아져 들어오면서 바다로 바뀐 것이다.(1)
무섭게 쏟아지던 빗줄기가 보스포루스다리 부근에서 배를 돌릴 무렵부터 가늘어지면서 갈라타 다리 부근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는 멎었다. 다행이다. 배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점심을 먹으로 갔다. 이날 점심은 소고기케밥이었는데, 이날따라 향신료를 많이 넣었던 모양으로 조금 불편했다. 점심 후에는 터키여행의 마지막 공식일정인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로 이동한다. 알고 보니 그랜드 바자르는 블루 모스크와 히포드럼을 지나서 가기 때문에 우리는 히포드럼을 세 번째 지나는 꼴이 되었다.
오락가락하는 비 사이로 그랜드 바자르로 이동하는 동안 무슬림 예배시간이 되었는지 아잔소리가 울려 퍼진다, 모든 모스크에서 아잔을 노래하기 때문에 아잔소리가 겹쳐 들린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메카를 향하여 절을 하는 무슬림이 눈에 띄지 않더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터키여행기를 적으면서 아잔소리가 울려 퍼지자 거리에서 예배를 드리는 무슬림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 것 같은데 그 사이에 세상이 변했나 싶다.
터키어로는 ‘지붕이 있는 시장’이라는 의미의 카팔르 차르슈(터키어:Kapalıçarşı)라고 부르는 그랜드 바자르는 비잔틴제국 시절 지어진 것이다. 콘스탄티누폴리스를 정복한 메흐메드2세의 명에 따라 1461년 확장한 이래로 여러 차례의 화재와 지진 등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보수와 증축이 거듭되었다. 이스탄불이 오스만제국의 중심이 되고, 시장 밖에 실크로드를 건너온 대상들이 짐을 풀 수 있는 카라반 사라이를 설치하면서 지금은 3만 700제곱미터의 면적에 보석, 카펫, 구리와 가죽제품, 수공예품 등을 파는 4천여 개의 상점이 들어서 있다. 오늘날 하루 25만에서 40만명의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4)
시장에는 모두 27개의 문이 있고 길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 길을 잃으면 방향을 잡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가이드는 1번 게이트에 일행을 풀어놓고 길을 따라 쭉 나가면 7번 게이트에 도착한다고 일러주면서 옆 골목으로 깊이 들어가지 말라고 강조했다. 막상 시장에 들어섰더니 재래시장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현대화된 탓에 보석, 가죽 등 특별해보이지 않은 상품들을 팔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가 제한된 시간에 제한된 장소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날 그랜드 바자르에서 본 특별한 것은 모든 가게들이 붉은색 터키 국기를 내걸고 있는 점이었다. 그리고 아랍풍의 요술램프가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작은 쟁반에 차를 담아 나르는 남자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상술이 뛰어난 이곳 상인들은 거래에서 차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상인들은 물건을 사려는 사람에게 공손하게 차를 권하고 손님이 차를 받아들이면 일단 거래를 시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참고자료
(1) 이종헌 지음. 우리가 몰랐던 터키 역사기행 112-113쪽, 소울메이트, 2013년
(2) 오르한 파묵 지음. 이스탄불 79쪽, 민음사, 2008년
(3) 오르한 파묵 지음. 검은책1 34-35쪽, 민음사, 2007년
(4) Wikipedia. Grand Bazaar, Istanb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