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수수료 전가와 불합리한 의료기기 유통구조 개선을 위해 ‘간납사’(간납도매업체·구매대행업체)와의 전쟁을 선포한 의료기기업계에 급제동이 걸렸다.
일부 대형병원들이 간납사를 양성화해 비정상적인 관행을 고착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마지막 보루였던 ‘서울아산병원’마저 구매대행계약을 체결한 것.
앞서 서울아산병원은 지난해 구매대행사 선정을 위한 외부입찰을 진행하다 간납사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에 부담을 느껴 당초 계획을 유보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간납사 ‘이지메디컴’이 최근 의료기기업체에 보낸 공문을 보면 서울아산병원은 돌연 입장을 바꿔 ‘통합물류체계 전환’을 이유로 구매대행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확인됐다.
메디칼타임즈가 입수한 공문에는 ‘서울아산병원 수술실 진료재료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2016년 4월 1일부로 구매대행사인 이지메디컴을 통한 통합물류 체계로의 전환’을 알리고 단가계약을 위한 견적서·납품실적 등 관련 서류를 18일부터 26일까지 제출토록 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을 접한 의료기기업계는 깊은 우려와 함께 긴 한숨을 내쉬고 있다.
지난해 업계는 ▲과도한 간납수수료 ▲유통질서 교란 ▲물류창고 등 유통비용 전가 ▲불법 리베이트 양성과 함께 치료재료 상한제 취지에 벗어나 건강보험 재정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판단 하에 한국의료기기산업 내 ‘간납도매개선 TFT’를 만들어 제도개선에 나섰다.
이를 통해 간납사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 형성을 일부 가시화한 것은 물론 심평원·복지부가 각각 치료재료 유통과 병원 구매대행사 실태조사에 나서게 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특히 간납사가 구매대행을 담당하는 대다수 대학병원과 달리 재단을 통해 직접구매를 해왔던 서울아산병원은 간납도매 제도개선 필요성을 주장하는 업계의 마지막 보루였다.
서울아산병원마저 간납사와 계약을 맺을 경우 간납도매가 더 이상 ‘비정상적 관행’이 아닌 하나의 정상적인 구매대행시스템으로 고착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이지메디컴 공문을 받은 업체 관계자는 “이번에 공문을 받고서야 서울아산병원이 간납사와 구매대행 체결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병원 입장에서 여론을 의식해 간납사와 모든 물품 구매대행 계약을 체결하지 않고 일단 수술실 진료재료만 국한한 것으로 보인다”며 “추이를 지켜보다가 점차 확대해 나가는 수순을 밟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간납사 구매대행 전환에 따른 간납수수료 인상도 불가피하다는 게 업계 전반적인 시각.
다국적기업 담당자는 “서울아산병원의 경우 재단 직접구매에 따른 기존 수수료가 3~5% 수준으로 알고 있다”며 “하지만 간납사가 구매대행을 하고 있는 타 대학병원 사례를 볼 때 당장은 아니어도 향후 10% 또는 그 이상 높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규모가 크고 제품 공급량이 많은 다국적기업은 그마나 수수료 인상 압박이 크지 않겠지만 중소업체나 대리점은 수수료 인상에 따른 마진폭이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같은 우려와 간납사 구매대행 전환에 대해 서울아산병원 관계자는 “구매대행이라기보다는 병원 물류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통합물류 선진화 차원에서 이뤄진 선택”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그는 “구매담당 인력이나 물류에 대한 공간은 한정돼 있고, 또 수술실의 경우 간호사들이 물품을 관리하는데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구매대행사를 통한 통합물류 체계로 전환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재단과 병원 모두 공급사와의 상생에 대한 전체적인 것들을 고려했다”며 “업계가 우려하는 것처럼 건강보험 재정에 폐를 끼치거나 단가를 높게 책정해 중간 마진을 (병원이) 가져가는 수입구조를 만들기 위한 것은 전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업계는 서울아산병원을 계기로 간납사 철폐와 간납도매제도 개선을 위한 대응수위와 속도를 높여야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간납도매개선 TFT 한 위원은 “TFT 차원에서 간납사 철폐와 제도개선 목소리를 내왔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내는데 한계가 있었다”고 인정한 뒤 “서울아산병원을 계기로 이제는 협회 차원에서 단체행동에 나설 때”라고 주장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상황까지 직면하게 됐다”고 밝힌 또 다른 위원은 서울아산병원 간납사 구매대행이 업계가 추진해 온 간납도매 제도개선의 큰 ‘변곡점’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오는 3월 KIMES(국제의료기기·병원설비전시회) 기간 중 복지부·심평원·공정위·언론사·업체 등이 참여하는 공청회를 개최해 간납도매 폐해와 문제점을 공론화 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