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사고로 장애를 얻게 된 남편을 대신해 아내가 병원 측과 합의를 했다. 합의금은 6100만원. 진료비를 제외하면 3517만원이었다.
합의서에는 민원 제기, 언론 및 인터넷 등을 통한 호소, 면담 강요, 집회 시위 등의 행위를 모두 금지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아내는 자필로 서명함과 동시에 남편의 도장도 갖고 와 대신 찍었다. 신분증 사본, 가족관계증명서도 냈다.
퇴원 직전, 남편은 아내의 합의 사실을 알게 됐고, 그는 합의가 무효라며 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8민사부(재판장 정은영)는 최근 남편 동의 없는 합의서는 인정할 수 없다며 서울 J대학병원은 환자 김 모 씨에게 5억87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J병원은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은 셈이 됐다.
김 씨는 J대학병원에서 3차례에 걸쳐 뇌 수술을 받은 후 약 9개월 동안 재활치료를 받았지만 상태가 좋아지지 않았고, 좌측 편마비, 보행장애, 인지 기능 저하의 장애를 얻게 됐다.
김 씨 아내 이 모 씨는 남편이 입원해 있을 때 병원 측이 합의를 제안하자 대리인 자격으로 병원 측과 합의서를 작성했다. 이때 김 씨는 장애가 있었지만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거나 사리분별을 하지 못할 상태는 아니었다.
심지어 김 씨는 장애인이 된 것 때문에 병원에 대한 적개심을 공공연히 표출하고 있던 상황. 법원은 김 씨가 아내의 합의 사실을 알았다면 합의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병원 측은 "합의 당시 아내 이 씨가 남편의 도장 및 신분증을 제시했으므로 대리권 수여 표시에 의한 표현대리로 합의서는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기서 병원 측이 간과한 것이 있다. 아내의 대리권을 증명할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 재판부는 "아내가 남편의 도장, 신분증만 갖고 왔을 뿐 위임장 등 대리권을 증명할 서류는 갖고 오지 않았다"며 "신분증을 소지한 것만으로 대리권을 수여하는 표시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병원은 합의에 관해 남편에게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며 "아내가 남편을 대리할 권한이 있었다고 믿었음을 정당화할 객관적인 사정이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이에 따라 법원은 병원 측의 수술상 술기 부족 및 주의의무 소홀 과실을 인정하고 60%의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법률 전문가는 합의를 해놓고도 민형사 소송으로 이어지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의료사고 당사자의 동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법무법인 서로 최종원 변호사는 "환자가 의사 표시를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태면 합의서를 환자 본인이 쓰는 게 당연하다"며 "환자가 식물인간이 됐을 때가 문제다"라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환자가 식물인간이면 가족과 합의를 해야 하는데 이때 환자를 대리할 수 있는 사람은 배우자가 아니고 성년후견인"이라며 "이때는 병원 측이 성년후견인을 선임해 오라고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