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약소국 시절의 악습이다. 대표선수를 뽑아 운동 엘리트로 키우고 세계대회에서 메달을 따면 대리만족을 느꼈다. 온 국민의 염원이자 희망이라는 긍정적인 효과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변했다. 축구 대표선수가 일본을 이겼다고 내가 일본을 이긴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세대에는 주변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는지가 가족의 뜻이고 경력을 결정하는 주요 잣대가 되었다. 전문직 종사를 앞둔 젊은 분들 중에 주변의 시각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부모․·형제·자매가 희생을 치러 본인이 이 자리까지 왔다면 매우 감사한 일이다. 그렇지만 대의(代議, representation)에 따르는 대리행위와 내 만족은 구분해야 할 것이다.
혹시라도 잘못 왔다는 확신이 서면, 은인이 비판의 대상으로 돌변한다. 다른 사람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것은 선택받은 자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하지만 핏줄을 떠나 진정성의 기반 위에 스스로의 판단이 선행될 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주변인의 뜻이 반드시 내 열정의 촉매로 작용하는 것은 한때일 뿐이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데…' 하는 푸념 섞인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대학 선생을 보고도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며 마음의 변화가 시작된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대상만 바뀌었지 그대로다. 내 뜻을 대변해줄 주변인의 범위가 가족에서 동일 직종으로 확대되는 과도기에 지나지 않는다.
보건의료계의 이런 특성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다만 학생 신분임에도 벌써 그런 특성을 경험해야 하는 현실이 아쉽다. 예비 의료인은 전공과목을 선택할 시기가 다가오면 해당 분야 그룹에 들어가려 시도한다.
학교선배가 가장 접근하기 쉬운 통로인데, 분야별로 풀이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그 바닥에 머문다. 유유상종에 몰입하여 끼리끼리 문화에 심취할 위기를 맞는다. 주변을 둘러보면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 학생도 있는데, 학업에 집중하느라 시간을 내지 못했다는 말은 누가 들어도 아쉬운 대답일 것이다.
이런 성향은 졸업 이후에도 마치고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본과생의 경우 학교 이외에 개원가, 봉직의, 군의관(공보의), 전공의를 만나는 것은 똑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과 다름없다. 간호대, 보건대생도 마찬가지다.
조금 멀리 가도 의료계통 경영자문가, 브랜드매니저 정도 만나고 가족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이 많다. 비정기적이거나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들 중에 내 전공의 전문의를 제외하면 자산을 투자해줄 금융권 관계자가 전부라는 A 병원장의 말은 씁쓸함을 남긴다.
대의(代議)에서 대의(大醫)로
동일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자주 만난다면 다음 두 가지 습성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자문해보기를 권한다. 하나는 자기도 모르게 타 직종, 타 영역, 타 지역 출신을 폄하하는 습관이다. 큰 조직일수록 회식자리에서 타 직종, 타 대학 출신을 업신여기는 발언을 당연시 한다.
예비 의료인끼리 모여도 다른 학교를 욕하는 근거 없는 대화가 오간다. 회계법인, 법무법인에도 사(士)자끼리 모이면 타 직종을 업신여기는, 보건의료계와 비슷한 문화가 있는데 바람직하지 않다.
두 번째는 따라 하기 습성이다. 그들이 하면 나도 해볼까 하는 따라 하기가 경쟁의식으로 발전한다. 보는 사람이 그 사람이고 듣는 것도 그 이야기다. 그가 하면 나도 해야 할 것만 같다. 옆 병원 간판이 바뀌면 나도 이유 없이 바꾸는 격이다.
이렇게 되면 정형화된 프로세스를 제 시간에 마쳐 남과 함께 가야 하는 위기에 봉착한다. 따라 하기 식의 정형화된 경력경로다. 개원 아니면 학교에 남는다는 이분법을 깨지도 못하고, 어떤 일을 완수해도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 판단이 안 선다.
예비 의료인이라면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익숙함이라는 마취제'에서 깨어나야 한다. 구본형 선생이 말한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 필요한 시간이다. 적어도 대의(代議)에서 벗어나야 대의(大醫)가 될 가능성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주변 시각에 지나치게 심취할 필요는 없다. 자기다움이 더 믿음직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