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임수술을 원합니다"라고 했지만 수술청약서에 직접 쓰고, 남편이 서명까지 직접했지만 또 임신을 하게된 환자 L씨.
알고보니 의료진은 불임수술을 하지 않았다. 환자가 직접 작성한 수술청약서를 보지 못한 것이다.
L씨는 불임수술을 받지 못해 임신을 또하게 됐다며 의료진에게 책임을 물었다. ▲진료비 및 분만 수술비 ▲산후도우미 고용비 ▲임신기간 동안 노동능력 상실비 ▲불임수술을 받지 못해 태어난 아이의 양육비 및 교육비 ▲위자료 등을 요구했다.
어떻게 된 사연일까.
L씨는 경기도 A산부인과에서 제왕절개로 셋째를 출산하는 과정에서 수술청약서를 쓰던 중 간호사에게 불임수술을 요청했다.
불임수술을 원한다고 수술청약서에 직접 쓰고 그 위에 남편이 서명까지 했다.
하지만 제왕절개수술을 담당했던 의료진은 수술청약서를 확인하지 않았다. 산모가 불임수술을 원한다는 것도 보고받지 못했다. 결국 의료진은 제왕절개술만 하고 불임수술은 하지 않않았으며 L씨 부부에게 별다른 설명도 안했다.
문제는 이후 발생했다. 불임수술이 된 줄 알았던 L씨는 넷째 아이를 임신, 출산까지 했다.
L씨는 A산부인과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A산부인과가 불임수술 청약을 이의없이 받아들임으로써 불임수술에 관한 의료계약이 성립됐기 때문에 계약 불이행으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A산부인과 측은 "간호사가 보고하지 않아 불임수술을 시행하지 못했을 뿐 고의로 수술을 안한 게 아니므로 채무불이행 책임이 없다"며 반박했다.
2심까지 가는 법정다툼 끝에 A산부인과는 L씨 부부에게 7146만원의 배상책임이 있다는 법원 판결을 받아들였다. 법원은 L씨가 배상을 요구한 항목 중 진료비 및 분만수술비, 노동능력 상실비, 위자료 지급 책임이 있다고 봤다.
하지만 예상치 않았던 넷째 아이에 대한 양육비 및 교육비에 대해서는 법원 판단이 엇갈렸다. A산부인과와 L씨 부부는 2심 법원의 판단을 최종적으로 받아들였다. 결론은 A산부인과가 넷째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발생하는 양육비 및 교육비를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임수술 계약 불이행 책임, 양육비도 포함되나
불임시술을 목적으로 하는 의료계약은 다른 계약과는 달리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인간의 생명 및 탄생에 반하는 것이다. 그 계약의 불이행으로 부모가 손해를 입게 될 것인가의 문제는 부모의 재산상 이익과 아이의 생명권 중 어디에 우월적 지위를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착된다.
1심 법원은 의료진이 양육비와 교육비까지는 배상하지 않아도 된다고 봤다.
수원지방법원 평택지원 제1민사부(재판장 김재호)는 "채무불이행으로 원치않는 임신을 해 아들이 태어났지만 아이가 성인이 될때까지 양육비 등을 지출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부모의 손해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원치않는 출생이라도 아이의 생명권은 절대적으로 보호돼야할 가치로서 부모의 재산상 이익에 우선해야 한다"며 "부모는 일단 출생한 자녀에 대해서는 부양의무를 면할 수 없기 때문에 아이의 출생 및 그로 인한 부양의무를 손해로 파악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L씨 부부가 넷째 아이에 대한 양육비 및 교육비를 배상받아야 한다고 봤다.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생명보다 부부의 결정권이 우선이라고 본 것.
서울고등법원 제9민사부(재판장 성기문)는 "불임시술 의료계약은 부부의 결정권과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생명이나 탄생 가능성 사이의 충돌이 불가피한 계약"이라며 "불임시술에 관해서는 특별한 법률상 제한을 두고 있지 않고 있다"고 운을 뗐다.
이어 "법은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인간의 생명 및 탄생 가능성의 보호보다는 구체화된 생명인 부부의 결정권을 우위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며 "불임시술 계약이 불이행된 경우 불임시술 당사자인 부부가 계약을 불이행한 의사에게 통상적인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또 "계약을 불이행한 상대방에게 양육비 등의 손해배상을 받는다고 해서 태어난 아이의 존재 자체를 손해로 보는 것은 아니므로 아이의 존엄성이 침해된다고 볼 수 없다"며 "부모의 부양의무를 계약을 불이행한 의사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볼 수도 없다"고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