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요구대로 기밀에 해당하는 원재료·시험규격을 제출하자니 불합리하고, 거부하자니 코드 등록이 안 돼 신제품을 팔수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의료기기업계가 ‘의료기기 수입허가증’ 때문에 속앓이를 하고 있다.
복수의 다국적기업 관계자에 따르면, 업계가 전전긍긍하고 있는 속사정은 이렇다.
세브란스병원 물류팀은 지난해 말 의료기기업체들에게 신제품 병원 코드 등록을 위해 의료기기 수입허가증 복사본 전체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모양 및 구조 ▲사용 방법 ▲사용 시 주의사항 등 제품 확인을 위한 수입허가증 일부 내용만 간소하게 제출했던 것과 달리 원재료·시험규격까지 내라는 것이었다.
업체들은 일부 항목만 요청하는 타 병원과 달리 기밀정보를 포함한 수입허가증 복사본 전체를 제출하라는 이례적인 요구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원재료와 시험규격은 세부 스펙이 공개될 경우 제품을 손쉽게 카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대외비로 취급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홈페이지 제품정보방을 통해 의료기기 수입허가증을 공개하지만 원재료·시험규격과 같은 업체 기밀정보는 비공개 하는 이유다.
다국적기업 A사 관계자는 “통상적으로 병원에서 신제품 코드 등록을 위해 요청하는 수입허가증 내용은 제품 번호, 모양 및 구조, 성능, 사용 설명서, 사용 시 주의사항 등 해당 제품을 식약처 허가와 확인하는 정도”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세브란스병원처럼 원재료·시험규격을 포함한 수입허가증 복사본 전부를 요구하는 곳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특히 “원재료·시험규격 등의 정보 누설을 막기 위해 병원에 기밀유지각서 작성을 요청했지만 (병원에서 서명한) 공식적인 문서가 나가는 것은 해 줄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고 덧붙였다.
다국적기업 B사 관계자 역시 지난해 말 세브란스병원으로부터 수입허가증 복사본 전체를 제출하라는 내용을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한 페이지도 빠짐없이 다 제출하라고 했다”며 “처음에는 원재료·시험규격이 기밀이라 내용을 가리고 냈지만 거부당해 결국 모두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이들 관계자들의 공통된 주장은 세브란스병원 사례가 매우 이례적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한 상급종합병원 물류팀 관계자는 “수입허가증이 필요한 이유는 새로운 비급여 제품의 수가나 적응증을 검토하기 위한 목적”이라며 “시험규격과 같은 기술적인 내용이 필요하지도 않을뿐더러 사실 봐도 잘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굳이 멸균이나 냉장·냉동 물류 부분에 참고하기 위한 것이면 모를까 시험인정을 어디서 받았고 시험규격 내용이 왜 필요한지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의아해했다.
또 다른 병원 구매팀 담당자 역시 “비급여 제품의 경우 사용목적에 맞게 식약처 수입승인을 받았는지 적응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수입허가증을 업체에 요청한다”고 설명했다.
업체 주장대로라면 세브란스병원은 왜 원재료·시험규격을 제출하라고 했을까?
업체들은 공통적으로 병원 물류팀으로부터 ‘환자 안전’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다국적기업 A사 관계자는 “의료기기 재사용이나 이대목동병원 수액세트 문제가 불거지면서 환자 안전을 위해 제품 정보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며 “심지어 식약처를 못 믿기 때문에 수입허가증 복사본 전체를 가져오라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또 다국적기업 C사 관계자는 “병원 측에 시험규격이 왜 필요한지 물었더니 (환자 안전을 위해) 우리가 구매하는 제품이 어떠한 규격을 통해 적합성을 통과했는지 알아야하고, 만약 제품에 문제가 생기면 병원이 테스트를 하기 위해서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밝혔다.
업계 일각에서는 세브란스병원이 ‘환자 안전’을 내세우지만 혹여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원재료·시험규격 등 정보를 활용해 병원 자체적으로 또는 제3의 업체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의료기기를 개발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지난해 말 세브란스병원이 수입허가증 전체를 요구하자 업체마다 대응은 제각각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병원 요구를 그대로 수용한 업체가 있었던 반면 일부 다국적기업은 원재료·시험규격 제출이 불합리하고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며 병원과의 대화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세브란스병원 요청을 반발 없이 받아들인 업체들은 심의를 통과해 코드 등록이 가능했지만 병원과 조율에 나선 일부 다국적기업은 이달 초까지도 신제품 코드 등록을 하지 못해 약 7~8개월 간 제품을 판매할 수 없었다.
복수의 다국적기업에 따르면, 해당 업체들이 원재료·시험규격 제출에 대한 어려움을 제기하자 이 점을 인정한 병원 측에서 원재료 제출은 빼주기로 했다.
시험규격의 경우 ‘을의 입장’에서 병원 요구를 무작정 거부만 할 수 없었던 만큼 내용을 조금씩 추가하는 방법으로 요약본을 작성해 여러 차례 병원에 제출했다.
지난해 말부터 최근까지 약 7~8개월 동안 진행된 일부 다국적기업과 병원 간 반복됐던 요약본 제출과 거부는 이달 초 해당 제품이 심의를 통과하면서 일단락됐다.
“원재료 포함 수입허가증 전체 요구한 적 없어” 반박
세브란스병원은 원재료·시험규격을 포함한 수입허가증 복사본 전체를 요구했다는 일부 다국적기업들의 주장을 전면 반박했다.
본원 물류팀이 홍보실을 통해 기자에게 밝힌 질의서 답변에 따르면, 수입허가증 복사본 전체를 요구한 적이 없을뿐더러 원재료 또한 아예 요청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다만 시험규격은 법적 자문 후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받아 요구한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시험규격의 경우 일부 업체에서는 문제가 생기면 제출하겠다고 입장을 밝혔지만 병원 입장에서는 환자 안전을 위해 해당 제품을 사용해도 되는지 근거 마련을 위해 사전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해 요청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갑자기 지난해 말부터 시험규격을 요구하게 된 계기를 묻는 질문에는 “특별히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이전에도 업체들에게 구두로 시험규격을 요청했었다”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구두로 요청하던 것을 명문화 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해 법적 자문을 통해 내규로 추가했고 시행을 지난해 말부터 했을 뿐”이라고 부연했다.
또 업체들이 요구한 기밀유지각서 작성을 거부한 이유로는 “병원이 업체 요구를 모두 받아들일 필요는 없으며, 또 기밀유지각서를 반드시 작성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업체 측에서 병원이 꼭 작성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법적 자문을 받은 후 그 근거를 말해주면 우리 또한 법적 자문을 받아 맞다고 판단될 경우 응하겠다는 답변을 했지만 이후 더 이상 언급이 없었다”고 덧붙였다.
특히 업체들의 시험규격 등 정보를 활용해 병원 자체적으로 또는 제3의 업체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의료기기를 개발하려는 건 아닌지에 대한 의심과 관련해 ‘전혀 예상 밖의 일’이라며 선을 그었다.
세브란스병원은 “환자 안전을 위한 제품의 사용 적합성 여부를 알기 위해 시험규격을 요청한 것인데 이런 걱정을 할지는 생각조차 못했다”며 “(기업들의 기밀정보를) 외부에 한 번도 유출한 적이 없고 업체와의 컨소시엄 구성 가능성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