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면 병원에 보릿고개가 찾아온다. 최고참인 레지던트 4년차들이 전문의 국가고시 준비를 위해 잠시 현장을 떠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한데 최고참들이 빠지면 타격이 크다.
더군다나 외과계열은 4년차들이 수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제법 높아 연말 수술실은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성형외과의 경우 겨울 방학기간에 환자들이 많이 몰리고 수술 건수도 증가하기 때문에 연말 연초는 고통스러운 보릿고개가 시작된다.
보릿고개는 농가에서 가을 작물을 모두 소비하고 보리가 여물기 전 인 5월과 6월의 식량사정이 어려운 상황을 의미한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하고 있었는데 연말에 갑자기 더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인원수 로 따지면 인력 중 25퍼센트만 빠지는 것이지만 수술실 상황은 손실이 무척 크게 느껴진다.
물론 보릿고개는 1년차가 2년차로, 2년차가 3년차로, 3년차가 4년차 로 성장하는 데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다. 4년의 수련이 끝나고 전문의 시험을 통과한다고 해서 짠하고 전문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 계단 한 계단 밟아가는 것처럼 연차별로 성장하면서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다. 1년차 때 배워야 하는 술기가 있고 4년차가 되면 그에 걸맞은 술기, 수술실을 책임질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는 것이다.
간혹 환자에게 수술을 설명할 때면 이런 질문을 듣곤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교수님이 직접 다 하시는 건가요?" 최근 대리 수술이나 비의료인이 수술을 집도하는 문제들이 사회적으로 불거지면서 이런 의심이 생겼다.
심지어 강남의 성형외과 개원가에서는 수술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CCTV를 통해 보호자가 지켜볼 수도 있다는 마케팅도 한다. 의사와 환자간의 불신도 안타깝고 같은 질문을 하는 환자나 보호자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질문 자체는 수술이 진행되는 과정을 한 번이라도 지켜본다면 그릇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수술을 집도의 혼자서 하는 것은 힘들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시간도 오래 걸리고 수술도 힘들어진다. 당연히 수술 결과도 좋지 않다.
수술 어시스턴트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더군다나 종합병원에서 수행하는 많은 종류의 고난도 수술은 더욱 그러하다. 수술은 대개 2명에서 최대 5명까지 팀으로 이뤄진다. 그 팀원으로 레지던트가 참여하면서 수술을 배우고 직접 해보면서 성장한다.
수술은 다른 의학 분야와 달리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기술이 매우 중요하다. 책 내용을 아무리 읽어본다 해도 눈앞에서 4차원으로 진행되는 수술을 금방 따라할 수는 없다. 1년차 때는 간단한 피부 봉합에서 시작하여 피부 이식술을 배운다.
해가 지날수록 근육을 박리하고 봉합하고 골절된 뼈를 수복하는 등의 복잡한 술기를 직접 수행한다. 4년차를 마칠 때면 수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도맡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다. 그리고 국가고시를 통과해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면 어엿한 전문의가 탄생한다. 물론 이후로도 많은 시행착오와 경험을 통해 보다 원숙한 단계로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종합병원의 이런 생리에 불편함을 표하는 환자들을 본다. 많은 형태의 종합병원, 특히 교육을 책임지는 수련병원은 미래 의사들을 양성한다. 양성에 있어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술기는 전통적인 교육 방법이자, 전 세계적으로 널리 수용되는 교육법이다.
그것은 때로 환자의 병상 옆에서 교수님과 레지던트가 나누는 토의로 나타나기도 하고, 응급실에서 위태로운 환자의 흉부를 번갈아 압박하면서 전해지기도 하며 수술실에서 교수님이 레지던트에게 메스를 넘기면서 전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이 가장 두드러지게 일어나는 시간이 보릿고개의 순간이다. 4년차 선배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3년차는 빠르게 성장한다. 그렇게 신분 상승과 함께 처음 해보는 술기 앞에서 짜릿한 순간들을 맛본다. 어시스턴트 역시 서는 위치에 따라 수술대 위의 풍경이 달라진다.
저연차 때는 수술대 변방에서 어깨 넘어 힐끗힐끗 배운다면 고연차 때는 집도의 바로 옆에서 수술의 모든 과정을 방해 없이 눈에 담을 수 있다.
흔히 서젼은 센스가 좋아야 한다고 한다. 어시스턴트로서 집도의 교수님이 의도하는 바를 재빠르게 파악해서 매끄럽게 수술이 진행될 수 있도록 들어갈 때와 빠질 때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처음 손발을 맞추는 팀은 서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수술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술이 반복되고 어시스턴트의 경험이 쌓일수록 언제부터인가 집도의와 팀원들 사이에 대화 없이도 수술이 술술 진행된다.
정해진 수순대로 진행된다 하더라도 기계 공정처럼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정해진 수순 중간에 발생하는 개별적인 상황에 센스 있게 집도의를 따라가야 한다.
"옳지. 바로 거기, 이제 잘 보이네." 집도의와 어느 순간 합이 맞았을 때 느껴지는 쾌감 역시 짜릿하다. 수술 센스는 타고 난다고 하지만 보릿고개를 버티는 동안 강제로 센스도 길러진다.
그래서 보릿고개 기간에는 수술실이 시끄럽다. 아무래도 졸업하기 직전의 4년차에 비해 3년차의 센스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1년의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손발을 맞춰가는 과정에서 수술실 분위기가 냉랭해지기도 하고 고함도 울려퍼진다. "아니 거기를 그렇게 당기면 안 되지. 아직도 수술을 이해 못하겠어?"
하지만 보릿고개를 거쳐야 연차가 올라갈 수 있다고 했듯 뿌듯한 첫 경험을 할 수 있다. 매일 봉합사 컷만 하던 위치에서 근막도 봉합하고 피부도 모양에 맞춰 깔끔하게 봉합한다. 골절된 뼈에 금속 플레이트 나사를 이용하여 단단하게 고정할 때 느껴지던 손맛도 보릿고개에 맛보았다.
무영등이 밝혀주는 피부 위에 조심스레 메스로 절개를 할 때, 미세한 혈관을 루뻬를 통해 보며 한 가닥 한 가닥 박리할 때의 쾌감과 뿌듯함 역시 보릿고개에 찾아왔다.
보릿고개가 지나가면 풍족함이 찾아온다던 어르신들 말씀은 틀림이 없다.
※본문에 나오는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동의를 통해 그의 저서 '성형외과 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