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을 기도한 환자의 치료거부에 대해 결박을 해서라도 치료했어야 한다며 의사의 과실을 인정한 판결에 대해 당시 진료기록을 의협이 감정했던 것으로 밝혀져 주목된다.
앞서 대법원은 농약을 마시고 술에 취한 환자가 자기결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의사의 생명보호 의무가 우선된다며 의사의 과실을 인정하는 판결를 최근 확정, 의료계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의협이 여지껏 법원의 진료기록 촉탁감정을 해당 절차에 의해 담당해 왔지만 이번 판결이 '제2의 보라매사건'으로 불릴만큼 현 의료계에 파장을 일으킬 사안이었다면 사전대처가 소홀했다고 지적받을 여지도 있다.
22일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결박판결'의 1심 재판부인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민사5부)에 따르면 의료소송 절차에 따라 진료기록에 대한 의학감정을 대한의사협회(당시 김재정 회장)에 의뢰했고 지난 2000년 11월 감정결과가 법원에 제출됐다.
2심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은 대한의사협회장의 감정결과외 추가로 순천향대학천안병원장에 대한 사실조회를 통해 피고 병원측 증언 일부에 대해 달리 반증이 없다며 채택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의협의 감정은 법원의 진료기록 감정의뢰 처리절차에 따라 단순 진료기록에 대한 분석으로 그쳤으며 결박의 필요성 등 상황판단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고등법원 예지희 판사는 "여지껏 의료소송에서 의협에 진료기록 감정을 의뢰하는 것은 일종의 절차인데 여기서 재판부의 판단 상황까지 감정을 촉탁하지는 않는다"며 "의협은 진료기록에 대한 판독과 그 적정성 여부만을 감정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의협 권용진 대변인은 "법원에서 진료기록 감정의뢰가 오면 집행부가 감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련 학회나 병원으로 이관하게 된다"며 "집행부가 진료기록을 감정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권 대변인은 "현재 판결에 대한 대응여부를 논의 중에 있다"면서 "이미 대법원의 판결이 나온 상황에서 매우 민감한 문제라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의협이 진료기록에 대한 단순 감정만으로 의료현실을 소명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냐는 일각의 비난 여론은 의협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이번 판결은 대법원까지 갈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됐었고 2심 재판결과가 언론을 통해 지난 2003년 2월 보도돼 3심 결과가 예상되는데도 의협의 대응은 없었다는 지적이 있다.
한편 법조계를 비롯, 환자 단체 등 의료계 외부에서는 이번 판결에 대해 정당성을 인정하고 있는 분위기다.
비록 자살을 기도했더라도 술에 취한 상태였고 자기결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족들이 살려달라며 내원시켰다면 의사는 응당 생명보호 의무를 준수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한 의료사고시민연대 등은 이번 판결을 계기로 의사의 진료기록을 의사협회가 감정하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며 의료사고 소송에 있어 제3의 조정기관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의사들은 결박해서 치료를 했더라도 환자가 치료를 거부했는데 조치했다며 진료비 납부를 거부하는 경우도 허다하고 자살을 기도한 환자가 완강히 치료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최대한 노력했어도 사망하면 의사책임이라며 자조적인 한탄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