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국이 가임기 여성들에게 임신을 하지 말 것을 주문하고 나섰다. 6~70년대 산아제한 시절의 얘기가 아닌 바로 오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대한적십자사가 기형아를 낳게 할 수 있는 성분의 혈액을 전국의 가임기 여성들에게 실수로 수혈해 놓고 이제 와서 임신하지 말 것을 주문하고 나서 물의를 빚고 있다.
지방에 사는 A(33)씨는 최근 대한적십자사가 보낸 편지 한통을 받았다.
'건선치료제(아시트레틴 성분)를 복용한 사람의 혈액을 수혈 받은 사실이 밝혀졌다. 기형아를 출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임신 중이거나 임신을 계획하고 있다면 연락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A씨는 그때서야 올해 4월 서울의 한 병원에서 불임 치료를 하던 중 수혈 받은 혈액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A씨는 안내된 적십자사 남부혈액원으로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임신은 위험하니 2년간 아이를 가지지 않는 게 좋다"는 말만 들어야했다.
A씨는 "임신이 안돼 지난해 9월부터 서울에 왔다 갔다 하며 수 백 만원을 들여 불임 치료를 받고 있는데 분하고 억울하다"며 "한 달이 급한데 2년간 임신을 하지 말라면 35살에나 아이를 가지라는 말인데 그 때는 또 어떻게 기약하냐"며 안타까움을 호소했다.
문제의 건선(마른버짐)치료제는 전립선비대증, 탈모증, 여드름 치료제와 함께 기형아 출산 등의 부작용 가능성이 있어 적십자사가 헌혈을 금지하고 있는 4대 성분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적십자사의 실수로 문제의 약물을 복용한 사람들의 혈액이 채혈돼 모두 4,000여명에게 수혈된 것으로 확인됐다.
수혈자 가운데 A씨와 같은 가임기의 여성만도 4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 적십자사는 이들 여성들에게 편지를 보내 피임을 권유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적, 출산 피해만들고도 대책은 나몰라라
그러나 A씨처럼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금전적·정신적 피해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보상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이미 임신을 했거나 본의 아니게 아이를 갖게 되는 여성들에 대한 앞으로의 대책은 세워지지 않고 있다.
대한적십자사 서동희 혈액안전국장은 "문제의 성분이 위험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위험성이 높지는 않다"며 "임신한 여성들에게는 산부인과 전문의를 연결해 상담을 받게 하는 방법 외에는 뾰족한 대책이 없다"고 밝혔다.
또 전문의 진단 결과 임산부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판단이 나올 경우에는 상황은 더 난처해 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 국가가 나서 임신 중절이라는 불법행위를 권유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대한적십자사는 문제가 불거지자 채혈을 하는 과정에서 헌혈자에게 건선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지를 반드시 묻도록 문진표를 고쳤다.
그 동안에는 단순히 "피부질환을 앓은 적이 있는 지"만 묻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다. 헌혈자가 문진할 때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혈액관리법 개정 다시 부각
이 때문에 혈액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혈액관리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전재희 의원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관리하고 있는 헌혈 금지 약물 투여자의 명단을 채혈기관인 적십자사도 조회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야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는 법 개정의 필요성은 공감한다면서도 적극성을 보이지는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 혈액장기팀 정예헌 사무관은 "법 개정이 하루아침에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며 "약물투여자의 정보 공개에 대해 에이즈감염 단체 등이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청회 등을 통한 여론 수렴 과정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수혈은 한번 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된다는 점에서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혈액 사고에 대한 시급하고도 치밀한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
CBS사회부 권민철 기자 twinpine@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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