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의 등장과 함께 부각된 당연지정제 완화 논의가 사실상 중단됐다. 여론에 밀렸다는 분석이 비등한 가운데 당연지정제 완화의 기대감에 부풀었던 의협과 의료계는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보건복지가족부는 29일 "모든 국민의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해 건강보험의 당연지정제를 확고히 유지하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라고 밝혔다. 게다가 국무위원과 이명박 대통령의 재가까지 받아 재론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사실 당연지정제 완화를 꺼낸 것은 정권 인수위원회였다. 인수위는 당연지정제가 사유재산 제도의 침해 등 많은 문제점이 노출돼 국민에게 불편함이 없는 방안으로 단계적으로 완화할 것을 제안했다.
그럼에도 정부가 인수위의 제안을 공론화과정도 없이 뒤집은 데에는 여론의 악화를 더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이 깔려있다는 분석이다.
당연지정제 완화와 민간의료보험 활성화 등 의료산업화로 인한 의료비 폭등과 진료 제한 등의 우려가 마이클 무어 감독의 '식코'를 타고 급격히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복지부 관계자도 "당연지정제 논의는 정치적으로도 아무 실익이 없는 데도 자꾸 논란이 되어서 종지부를 찍자는 차원에서 발표한 것"이라면서 "장관 개인의 입장이 절대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정부가 당연지정제 완화 논의에 쐐기를 박음에 따라당연지정제 완화를 최우선 과제로 요구했던 의사협회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하지만 정부가 공식 입장을 밝힌 이상 상황을 뒤집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주수회 회장은 "우리는 당연지정제 완화 논의조차 거부하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면서 "일부 여론몰이에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지도 않고 선을 그어버린다면 역대 정부와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격한 감정을 쏟아냈다.
의료계에서도 실망스러운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당연지정제를 전면에 내건 의협의 아젠다 설정과 대응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한 개원의는 "처음부터 이명박 정부가 개혁의지가 없었던 것 아니냐"면서 "공론화 과정이라도 있었다면 우리의 문제를 알릴 기회라도 있었을 텐데 그마저도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다른 개원의는 "국민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 채 의협이 실현되기 힘든 당연지정제 완화를 회원의 의견도 묻지 않은 채 최우선적으로 내건 것이 실책"이라면서 "당연지정제 완화는 애초부터 실현되지 힘든 주제였고, 현실적으로 접근할 아이템들도 접근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한 지역의사회장은 "전문가집단의 의견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새 정부가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의협의 정치력에 큰 의심이 간다"며 "한나라당 비례대표 선출 문제 등 여러가지를 볼 때 회장을 비롯한 의협 집행부의 정치력이 부족한 한계도 있다"고 말했다.
시민단체들은 당연지정제 완화 논의를 중단했다고 해서 영리법인 허용, 민간의료보험 활성화라는 의료산업화 기조가 바뀌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건강연대 관계자는 "국민 여론에 밀려 당연지정제 완화 주장은 폐기했지만, 영리법인과 민간의료보험 활성화를 통해 충분히 목적을 실현할 수 있다"면서 "의료산업화의 기본 구도는 차이가 없기 때문에 큰 변화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