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 중심의 병원환경을 연구중심으로 바꾸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연구중심병원 사업이 방향성을 잃고 헤매고 있다. 예산이 없는 복지부는 병원의 희생을 강요하고, 수백억원의 정부 지원을 기대하며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던 병원들은 혼란에 빠졌다. <메디칼타임즈>는 연구중심병원 사업의 현황과 전망에 대해 짚어봤다. <편집자주>
<상> 연구중심병원, 빅5만의 잔치되나 <하> 방향성 잃은 연구중심병원 불신 자초
"대형병원의 진료 기능을 축소하고 고부가가치 연구사업으로 방향을 돌려 환자 쏠림 현상을 해소하고 차세대 성장동력을 마련하겠다."
보건복지부가 2009년 연구중심병원 도입 계획을 발표하며 제시한 정책 방향이다.
이를 위해 복지부는 총 2조 4천억원이라는 예산 지원을 기획한다. 진료를 축소하고 연구를 활성화하는 과정의 연착륙을 위해 정부가 돕겠다는 의지였다.
"예산 지원 없다" 복지부 폭탄 선언…병원들 "양극화 우려"
그로부터 3년 뒤인 2012년 11월. 복지부는 돌연 예산 지원을 기대하지 말라며 선을 그었다. 연구중심병원 전환은 자율적인 것으로 병원 스스로의 결단에 맡기겠다며 뒤로 물러선 것이다.
복지부 허영주 보건산업기술과장은 "연구중심병원은 극소수만 지정할 것이며 예산 지원은 없다"며 "그렇기 때문에 병원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방침이 알려지면서 병원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정부의 예산 지원을 기대하며 3년간 시설과 인력을 확충한 것이 자칫 고스란히 손해로 돌아올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A대학병원 관계자는 "어떻게 정부 정책이 손바닥 뒤짚듯 바뀔 수가 있느냐"며 "정부를 믿고 최선을 다해 연구중심병원 전환을 추진하던 병원들은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지방에 위치한 대학병원이나 전문병원들은 빅5로 불리는 대형병원 집중 현상을 우려하고 있다.
예산 지원이 없다면 결국 의지가 있는 곳이 아니라 인프라가 이미 구축된 곳을 지정하지 않겠느냐는 것. 말 그대로 빅5 독식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다.
B대학병원 관계자는 "분명 정부는 연구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할 의지가 있는 곳을 선정하겠다고 강조해왔다"면서 "대다수 병원들은 이러한 방향을 믿고 짜임새 있는 계획을 세우는데 집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예산 지원이 없다면 막대한 자본을 앞세운 대형병원과 시설 등 인프라가 경쟁이 되겠느냐"면서 "결국 빅5병원들이 독식할 수 밖에 없다는 얘기"라고 꼬집었다.
문제는 만약 이들의 우려대로 대형병원들이 연구중심병원을 유치할 경우 양극화가 더욱 극심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연구중심병원으로 지정되면 예산 지원이 없는 대신 세제 혜택과 교과부, 지경부 국책 과제들을 우선 수주해 주겠다고 공언했다.
이미 막대한 자금력으로 시설과 인적 인프라를 갖춘 대형병원들이 연구중심병원까지 가져갈 경우 사실상 독점 형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관계자는 "이미 대형병원들이 대규모 국책과제들을 대부분 가져가고 있는데 이제 연구중심병원까지 지정되면 정부 과제를 모두 싹쓸이 하지 않겠냐"면서 "그러면 우리 같은 지방 병원들은 연구 기능이 마비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껍데기만 남은 연구중심병원…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렇다고 대형병원들도 마냥 즐거운 것은 아니다. 연구중심병원에 지정된다 해도 큰 실익이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들은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입장이다.
C대형병원 연구부원장은 "복지부 지정 연구중심병원에 지정이 되건 그렇지 않건 우리는 자체적으로 연구중심병원 전환을 추진할 것"이라며 "연구중심병원을 지향하는 것은 패러다임 변화를 통해 미래를 계획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솔직히 우리 병원과 몇몇 병원 외에는 연구중심병원으로 갈 수 있는 환경 자체가 되질 않는다"며 "복지부도 그것을 알고 있고 그래서 예산 지원이 없다는 것을 발표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고 덧붙였다.
결국 정부의 지원 없이도 충분히 연구중심병원 전환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이렇듯 병원들이 자기 길을 가겠다는 표현은 결국 정부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또한 정부가 이미 방향타를 놓쳤다는 방증이다.
애초에 정부는 대형병원 환자 쏠림 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연구중심병원을 기획했다.
진료에 매진하고 있는 대형병원의 인프라를 연구로 돌려 환자 쏠림을 억제하고 메이요클리닉이나 MD앤더슨 같은 연구사업 수익을 노려보자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3년에 걸쳐 정책이 표류하는 사이 연구중심병원 사업은 그 본래의 목적을 상실했다. 여기에 예산 지원이 불투명해지면서 당근과 반대급부인 채찍마저 잃어버렸다.
D대학병원 관계자는 "예산 한푼 지원하지 않고 간판 하나 나눠주고는 어떻게 대형병원을 관리, 감독 할 수 있겠느냐"며 "당근이 있어야 채찍을 감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결국 대형병원은 진료는 진료대로 확장하면서 연구까지 독식하게 될 것"이라며 "이미 껍데기만 남은 연구중심병원 사업으로 무엇을 도모할 수 있겠느냐"고 따졌다.
이에 대해 복지부 관계자는 "예산 지원이 완전히 무산된 것도 아니며 계속해서 병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틀을 가다듬고 있다"며 "시행착오는 겪겠지만 연구중심병원 사업은 분명 진료에서 연구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데 일조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