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상| 서울대병원도 포기한 권역응급센터 지정 기준
"올 것이 왔다. 가랑이를 찢어가며 정부가 세운 기준을 맞추려고 애써봤지만 현실적으로 역부족이다."
권역응급센터 지정이라는 명예 뒤에 숨겨있던 까다로운 지정 기준에 대한 문제점이 수면 위로 급부상했다.
논란의 촉발제가 된 것은 최근 서울대병원조차 메르스 이후 강화된 지정 기준을 맞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다.
서울대병원은 지난 1월말까지 지정기준에 맞춘 사업계획서를 복지부에 제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최근 복지부에 확인한 결과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쳐 제출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병원 경영진이 새로운 지정 기준에 맞추기 위한 병원 내 공간을 도저히 마련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서울대병원은 고질적인 환자공간 부족문제로 첨단외래센터 건립을 추진 중인 상황. 여기에 권역응급센터 지정 기준을 맞추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권역응급센터 의료진들은 "놀랍지도 않다. 곪아 있던 문제가 서울대병원에서 터진 것일 뿐"이라는 반응이다.
익명을 요구한 모 권역응급센터장은 "얼마 전 외상센터와 소아응급실 등 대대적인 공사를 끝내자마자 또 다시 새로운 기준에 맞춰 공간을 재구성하기 위해 공사를 추진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권역응급센터 지정이라는 타이틀과 수가 가산 때문에 기준에 맞추려고 안간힘을 쓰고는 있지만 과연 맞출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권역응급센터들이 가장 부담스러운 부분은 부족한 공간. 최근 개정된 권역센터 응급실 전용시설 기준에는 '병상간 간격을 1.5m이상 확보할 것' '음압 격리병상 2병상 이상 갖출 것' 등 기존에 없는 기준이 포함됐다.
기존에 6병상을 설치할 수 있는 공간도 이 기준에 맞추면 4병상밖에 만들 수 없게된 셈이다.
단적인 예로 전국적으로 응급실 면적이 여유로운 편이었던 충남대병원도 지하 1층을 뚫어서 새로운 공간을 확보하는데 43억원의 예산을 쏟아 부었다.
충남대병원 한 의료진은 "정부가 기준을 발표하면 그에 따른 모든 책임은 병원이 짊어지고 가는 모양새"라며 "당장 공사를 진행하는 6개월간 응급진료가 위축되는 것 또한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더 심각한 것은 이 같은 문제가 권역응급센터 1~2곳만의 고민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한응급의학회 양혁준 이사장(길병원)은 "서울대병원이 지정기준을 못 맞춘 것은 다른 권역응급센터의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며 "타 권역센터는 마이너스를 감수하면서 기준에 맞추고 있다. 서울대병원이 이에 못맞춘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각 권역응급센터가 적절한 기준에 맞춰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자는 취지는 공감하지만 제도와 현실적 괴리감이 크다는 게 그의 설명.
양 이사장에 따르면 권역응급의료센터에 지정된 의료기관 중 약 30~40%가 기준에 맞추기 어려울 전망이다.
그는 이어 "이는 기간을 연장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라며 "학회 차원에서 권역응급의료센터 지정 기준이 과연 합리적이고 타당한지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난감하기는 복지부도 마찬가지다.
복지부 관계자는 "솔직히 우리도 당황스럽다. 가능한 기준에 맞춰서 함께 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면서 "일단 권역응급센터 사업계획서 마감일을 12월말까지로 연장한 상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