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르에서 트로기르로 가는 길에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자그레브 근처의 길과는 사뭇 다르다. 자다르에 가까워지면서 가을빛 선명하던 숲이 사라지고 키 작은 상록수 사이로 바위산의 속살이 드러난다. 발칸의 서쪽 뼈대를 이루는 디나르 알프스의 본모습이 이런가 보다.
트로기르(Trogir)는 크로아티아 본토와 치오보 섬(Čiovo) 사이에 있는 작은 섬에 들어선 마을이다. 스플리트-달마티아주에 속하며, 13,260명(2011년 기준)이 살고 있다. 본토, 그리고 치오보 섬과는 작은 다리로 연결된다.
치오보섬 쪽으로 튼튼한 성벽을 쌓아 감싸여진 마을 안에는 중세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작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다. 마을의 중심에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건축된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1997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역사적으로 토르기르는 기원전 3세기경 그리스인들이 정착하면서 수컷 염소를 의미하는 트라고스(tragos)에서 유래한 트라구리온(Tragurion)이라고 불렀고, 로마시대에는 항구도시로 발전했다. 9세기 무렵에는 크로아티아왕국에 속했고, 1123년 사라센제국의 침략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빠르게 복구되었으며 12~13세기에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1242년에는 헝가리왕국의 벨라4세 왕이 이곳에서 타타르족의 침략을 피하기도 했다. 1406년 베네치아공화국이 달마시아 지방을 사들였을 때, 트로기르 사람들이 승복하지 않자 베네치아는 트로기르에 포격을 가하여 굴복시켜야 할 정도로 강한 기질을 가졌다고 한다. 1979년 베네치아가 몰락한 다음에는 19세기 초반 나폴레옹이 잠시 지배한 것을 제외하고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크로아티아에 속하게 되었다.(1)
터미널 부근 주차장에서 버스를 내렸다. 해안을 따라가다가 짧은 다리를 건너 토르기르섬으로 들어간다. 다리 끝에서 후기 르네상스양식으로 된 성의 북문을 만난다. 도시 입구인 북문 위에는 이 도시의 수호성인 성 이반 오르시니(St. Ivan Orsini) 조각상이 서 있다.
성문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왼쪽으로 30미터를 가면 이 도시의 중심인 콜 겐셔(Kohl Genscher)거리가 나온다. 1991년 크로아티아 독립을 전격 승인한 독일의 수상 헬무트 요제프 미하엘 콜(Helmut Josef Michael Kohl)과 외무부장관 한스 디트리히 겐셔(Hans-Dietrich Genscher)를 기리기 위하여 붙인 이름이다.
트로기르의 중심 이바나 파블라(Ivana Pavla) 광장 북쪽에는 트로기르, 아니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정교한 건물인 성 로렌스(St. Lawrence) 대성당이 있다. 이 성당은 1123년 사라센의 침략으로 부서진 초기 기독교 성당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는데, 1213년 시작하여 17세기 무렵에서야 완공되었다. 성당은 로렌스성인에게 헌정되었지만, 1111년 사망한 트로기르 주교 요한을 기리기 위하여 성 요한 대성당으로 더 알려져 있다.
1251년 무렵 완성된 성당의 주요부분은 로마네스크양식으로 되어 있는데, 15세기 무렵의 천정은 고딕양식이며, 후기에는 매너리즘양식이 가미되었다. 종탑은 14세기말 착공되어 16세기말까지도 완공되지 못했다. 복음서를 쓴 4명의 성인 조각상들을 종탑 꼭대기에 세웠다.
서쪽에 있는 입구에는 이 지역의 뛰어난 조각가 라도반(Radovan)이 제자들과 함께 1240년에 완성한 로마네스크양식의 조각 작품이 장식되어 있다. 입구 양쪽으로 서 있는 베니스의 상징 사자 위에 벌거벗은 아담과 이브가 서 있는 모습니다. 외벽 기둥엔 성인들을 조각했고, 계절에 따른 풍속, 꽃과 동물을 조각해놓았다. 문 위쪽으로는 반달 모양의 아치에 예수탄생을 표현했다.(2)
대성당 맞은편에는 시계탑이 있는데, 이는 항해를 하는 자들의 수호성인 성 세비스티안을 위한 르네상스 양식의 작은 교회였다. 시계탑 옆에 15세기에 니콜라스 플로렌스 (Nicholas of Florence)가 만든 한쪽 벽이 없는 트로기르 시(市) 복도가 있다. 복도 가운데 양각된 부조는 베네치아의 적수였으며, 투르크와 용감하게 싸운 태수 페트루 베리스라비추(Petru Berislaviću)를 나타낸 것으로 이반 메스트로비치(Ivan Mestrovic)의 작품이다.
시계탑 앞부분에는 15세기 니콜라스 플로렌스 (Nicholas of Florence) 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예수와 성 세바스티안 동상이 있다. 광장의 동쪽 건물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된 15세기의 시청이다. 시청과 시계탑 사이로 나가면 13세기에 만든 로마네스크양식의 세례자 요한성당을 만난다.
골목길을 돌아 섬 가장자리로 나가 치오보 섬(Čiovo)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끼고 걸으면 성벽에 붙여 지은 비투리(Vitturi) 궁전과 그 옆에 르네상스 문이 있는데, 성벽 아래로 가게들이 들어서 있어 궁전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이어서 1064년에 만들고 16세기에 확장한 “베네딕트파 수녀원”과 “성 니콜라스 성당”이 나타난다.
도로의 끝에 이르면 카메를랭고(Kamerlengo) 요새를 만난다. 카메를렝고요새는 13-15세기에 베니스 인들이 만든 해군기지였다. 토르기르는 자다르보다도 더 규모가 작은 탓인지 금세 한 바퀴를 돌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일행들과 만나기로 한 북문으로 가기 위하여 성문을 들어서는 순간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있어 당황하게 만들었다. 성안의 마을에서는 길을 놓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오늘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에서 묵기로 했기 때문에 토르기르와도 아쉬운 작별을 해야 한다.
트로기르에서 출발해서 꼬불꼬불 산길을 2시간여 달리다 보면 보스니아 국경에 다다른다. 버스가 멈추자 몸집이 비대한 크로아티아 출입국 직원이 버스에 올라 여권을 거둬간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가이드에게 ‘패스포드’라고 무뚝뚝하게 한 마디 한 것이 전부다. 세상이 바뀐 것처럼 사람도 바뀔 법도 한데 그게 어려운가 보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기사가 버스에 올라타더니 버스를 조금 앞으로 옮기더니 다시 내려간다. 이번에는 보스니아 입국수속을 하러간 것이다. 아니다. 틀렸다. 한참 뒤에 보스니아 출입국관리가 버스에 올라오더니 가이드가 가지고 있던 여권에 입국도장을 찍는 것이었다. 기사가 여권을 받아다가 가이드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여권은 제대로 돌려받았을까 은근히 걱정된다. 쓸데없는 걱정이겠지만 어떻든 비효율적인 모습인 것 같다. 시간도 더 걸리고 내 손을 떠난 여권소재가 불안하다. 차라리 슬로베니아에서 크로아티아로 들어올 때 했던 것처럼 출입국 창구에 각자 여권을 제시하고 확인을 받는 편이 낫겠다. 가이드말로는 호텔에 가서 여권을 돌려준다고 한다.
차창 밖은 어느새 캄캄해졌다. 고갯마루를 넘어서자 건너 편 언덕에 펼쳐지는 불빛만으로는 작지 않은 도시임을 알겠다. 하지만 버스가 시내로 들어섰을 때, 그리 늦지 않은 저녁임에도 거리는 한산해 보였다. 8시반경에 호텔에 도착했다.
무거운 짐을 끌고 로비에 들어서니 탁자 위에 일행의 여권이 내던져져 있다. 각자 알아서 찾아가라는 것이다. 인솔자겸 가이드까지 일인다역을 하는 고충은 알겠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버스에서 이름을 불러 나누어주든지 아니면 중간에 휴게소에서 나누어주었어야 했다.
식사를 9시까지만 제공한대서 식당에 먼저 내려갔는데 샐러드는 칼질을 얼마나 했는지 국수발처럼 가늘고 식초는 얼마나 뿌렸는지 시큼하다. 쇠고기는 충분히 익혔지만 냄새를 잡지 않은 탓에 아내가 들었던 포크를 내려놓는다. 같이 포크를 내려놓고 방으로 올라가서 집에서 가져온 컵라면으로 저녁을 때우다. 이런 것이 우정출연이겠지요. 방은 싱글베드를 넣어야 할 정도로 좁고, 여분의 콘세트도 없을 정도로 단촐하다. 짐을 풀어 놓을 테이블도 없어 의자 위에 풀었다. 이렇게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여행의 일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