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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보험 받으려면 신장 더 나빠지라니"

손의식
발행날짜: 2016-09-19 05:00:58

투석 시작 지연시키는 구형흡착탄, 급여기준 확대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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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분은 지금 만성콩팥병 3기입니다. 진행상황을 볼 때 약 5년 정도 지나면 투석을 해야할 것 같네요."


청천벽력 같은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물었다.

"투석을 늦출 수는 없을까요?"

잠시 고민하던 의사 선생님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투석을 지연시키는 효과가 있는 구형흡착탄이라는 약이 있어요. 환자분의 경우 지금 혈청크레아티닌 수치가 1.88mg/dL이에요. 그런데 건강보험 적용을 받으려면 2.0mg/dL이 넘어야 해요. 환자분은 건강보험 기준에 조금 못 미쳐요. 조금만 더 지켜봅시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건강보험료를 꼬박꼬박 내고 있는 내가 아픈데, 그리고 약도 있는데 건강보험 적용을 받을 수 없다니. 그리고 건강보험을 적용 받으려면 내 몸이 더 나빠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표정을 살피던 의사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처방해본 결과 2.0mg/dL 이하에서도 구형흡착탄을 복용하면 분명히 효과가 있어요. 그래서 비급여로 처방받는 환자들이 있고 그들의 혈청크레아티닌 수치도 조절되고 있어요."

하지만 직장을 구하고 있어 경제적 상황이 어려운 나에게 비급여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보다 상태가 조금만 더 나빠지면 건강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다니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결국 다음에 와서 검사를 받기로 하고 병원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투석 지연하는 약 있는데도 보험급여 위해 신장 악화만 기다려야 한다니"

위 상황은 조선대병원 신장내과 신병철 교수의 자문을 받아 실제 만성콩팥병 환자 K 씨의 사례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통계에 따르면 만성신부전증으로 인한 건강보험 진료인원은 2009년 9만 596명에서 2013년 15만 850명으로 연평균 13.6% 증가했다. 2014년에는 약 16만명으로 전년도 대비 4.6% 증가했다.

이처럼 증가하고 있는 만성콩팥병 환자들의 가장 큰 고민이자 고통은 바로 '투석'이다.

의료진에 따르면 만성 콩팥병이 계속 진행해 콩팥기능이 정상인의 10%이하로 저하되면 노폐물과 과잉 수분이 너무 몸 안에 많아져 콩팥기능을 대신하는 혈액투석 혹은 복막투석치료를 받거나 콩팥 이식을 받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혈액투석은 투석기계로 혈액에서 노폐물을 제거하는 과정으로 일주일에 세 번 인공신장실을 방문해 실시 받으며 평생 동안 지속적으로 실시해야 하기 때문에 만성콩팥병 환자 삶의 질을 저하시키는 가장 큰 요소로 꼽히고 있다.

이런 이유로 앞서 나온 K씨와 마찬가지로 초기 만성콩팥병 환자들의 첫 번째 소망은 투석 시작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는 것이다.

투석을 지연시키는데 효과적인 약은 있다. 바로 '구형흡착탄'이다.

지난 2004년 CJ헬스케어가 일본 제약사 구레하가 개발한 구형흡착탄을 '씨제이크레메진세립'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첫 선을 보였으며, 대원제약이 지난해 5월 국내 제약사 최초로 구형흡착탄 제품화에 성공해 '레나메진'을 출시했다. 특히 '레나메진'은 기존 세립제였던 구형흡착탄을 캡슐제형으로 재탄생 시키면서 복용 편의성을 대폭 향상시켰다.

투석과 신장 이식 외에 특별한 치료법이 없는 만성콩팥병 환자에게 구형흡착탄은 마지막 희망과 같은 약인 셈이다.

그런데 구형흡착탄의 급여기준이 제한적이라며 하소연을 하는 환자와 의료진의 목소리가 높다.

관련 고시에 따르면 구형흡착탄은 진행성 만성신부전으로 판정받은 투석 전 환자 중 혈청 크레아티닌 2.0mg/dL~5.0mg/dL인 환자에게 투여 시 요양급여를 인정하며, 동 인정기준 이외에는 약값 전액을 환자가 부담토록 하고 있다.

따라서 급여 기준상으로는 K씨와 같이 만성콩팥병 환자라도 혈청크레아티닌 수치가 2.0mg/dL에 미치지 못하면 받지 못하는 것이다.

조선대병원 신장내과 신병철 교수 "구형흡착탄, 조기에 쓰면 투석 지연에 더 효과적"

신장 전문가들의 의견은 급여기준과 조금 다르다. 초기에 약을 쓸수록 효과가 좋기 때문에 급여기준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조선대병원 신장내과 신병철 교수.
조선대학교병원 신장내과 신병철 교수는 메디칼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혈청 크레아티닌 수치가 2.0mg/dL 이하에서도 구형흡착탄을 복용하면 분명히 효과가 있고 투석 시작 시기를 지연하는데도 도움이 된다"며 "(혈청크레아티닌 수치가 2.0mg/dL이 안 돼)비급여로 구형흡착탄을 복용 중인 내 환자들의 경우 1.0mg/dL 후반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병철 교수는 "따라서 더 많은 만성콩팥병 환자들이 구형흡착탄의 혜택을 받기 위해선 급여기준이 확대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구형흡착탄 급여기준을 혈청크레아티닌 수치를 근거로 삼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고려대학교병원 신장내과 조상경 교수(대한신장학회 홍보이사)는 "구형흡착탄 급여기준의 문제는 정확한 신장 기능에 대한 평가가 아닌 혈청크레아티닌 수치를 통한 급여기준이라는 점"이라며 "혈청크레아티닌 데이터만 가지고는 환자의 정확한 신장 기능을 반영 못한다는 것은 확실히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고려대병원 조상경 교수 "구형흡착탄 급여기준, 혈청크레아티닌 수치에서 사구체여과율로 전환해야"

고대안암병원 신장내과 조상경 교수.
조상경 교수는 "이런 이유로 환자에게 제대로 약을 쓰지 못하게 돼 불합리한 것"이라며 "실제로 지금 이 약을 쓰면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음에도 급여기준 때문에 못쓰는 환자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혈청크레아티닌이 1.5mg/dL인 환자들도 사구체여과율을 조사해보면 상당히 떨어진 이들이 많다. 급여기준을 사구체여과율로 전환하면 그런 환자들도 혜택을 받을 수 있다"며 "더 환자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기 위해 현재 혈청크레아티닌 수치 기준을 사구체여과율 기준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사구체여과율로의 전환이 어렵다면 혈청크레아티닌 수치라도 확대해야 한다고 밝혔다.

조상경 교수는 "급여기준이 1.5mg/dL까지 확대된다는 것은 보다 조기에 약을 쓸 수 있게 된다는 것"이라며 "사구체여과율로 기준을 전환 못하더라도 혈청크레아티닌 기준이 확대된다면 많은 만성콩팥병 환자들의 진행을 늦추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심평원 "2.0mg/dL 이상에서 시작했으면 이하로 떨어져도 급여 인정"

건강보험심사평가원도 의료계의 이런 요구를 인지하고 있었다.

심평원 관계자는 "2006년도 분과위원회 논의사항으로 급여기준인 2.0mg/dL~5.0mg/dL에서 1.5mg/dL~5.0mg/dL으로 확대해달라는 의견이 있어 논의를 했지만 기존대로 유지키로 했다"며 "이유는 해당 약제가 일정 질환을 개선시키는 약제가 아니라 투석시기를 지연시키는 약제로 인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만약 혈청크레아티닌 수치가 2.0mg/dL 이상에서 해당 약제 투여 후 2.0mg/dL 이하로 떨어져도 투석 전까지는 급여로 인정될 수 있다"며 "명문화돼 있지는 않지만 심사사례에서 인정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구형흡착탄의 급여확대를 위한 근거는 부족한 상황이다. 임상현장에서의 처방 케이스 누적으로는 근거를 대신하기 어렵다"며 "다만 2006년 급여확대 요구 당시에 비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고 보는 만큼 논의의 여지는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의료계 일각에선 심사사례에서의 급여 인정범위가 명문화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A대학병원 신장내과 교수는 "심평원이 비록 심사사례에서 구형흡착탄의 허가사항 외 처방을 급여로 인정하고 있다고 하지만 급여기준으로 명문화돼 있지 않은 건 사실"이라며 "급여기준으로 명문화돼 있지 않은 이상 삭감이 무서워 방어적으로 처방할 수 밖에 없다. 보건당국이 만성콩팥병 환자들의 삶의 질을 생각한다면 심사사례로만 인정할 것이 아니라 급여기준을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편집자주|'급․기․야'는 '준 이젠 이기 할 때'의 줄임말로, 건강보험 재정절감을 이유로 제한적인 의약품 급여기준 확대를 통해 환자의 의료서비스 혜택 확대를 추구하고자 하는 메디칼타임즈의 연재 컨텐츠입니다.